오피니언 송호근칼럼

이념 정치, 일자리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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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보그룹의 정태수 회장이 한때 유행시킨 '머슴'이란 말의 뉘앙스는 그다지 좋지 않다.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하인(下人). '머슴이 한 일로 왜 주인이 구속되는가'라는 그의 파렴치한 항변은 현장을 뛰어다닌 진짜 일꾼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런데 이 말이 정부와 결합하면 근사한 뉘앙스로 바뀐다. 이른바 '머슴정부', 학문적 용어로 '서비스국가'다. 국민이 원하는 바를 묵묵히 수행하는 정부를 일컫는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참여정부의 슬로건도 따지고 보면 서비스국가론인 셈이다.

서비스국가의 요체는 '일자리 창출'과 '고용안정'이다. 본격적 취업기인 '제2의 인생'이 점점 짧아지는 현대생활에서 두 가지를 빼고 나면 인간 구실을 하기 어렵다. 왕성한 노동력을 한껏 배양한 30, 40대에게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면 사회의 버팀목인 중간연령층의 활력이 되살아날 뿐 아니라, 청년층과 고령자들에게도 만만찮은 파급효과가 있다. 그래서인지 미국 앨라배마 주지사는 현대자동차 생산공장을 유치하면서 인기가 급상승했다. 스페인과 아일랜드의 좌파 정당들도 외자유치에 팔을 걷어붙였다. 그 결과는 경제성장률과 좌파 지지율의 동반 상승. 독일의 연방고용청과 스웨덴의 노동시장국은 일자리와 인력을 빈틈없이 조응시키는 세계 최고의 효율성을 자랑한다. '일자리정치'야말로 유럽의 서비스국가가 조건 없이 합의하는 통치목표다.

4월 중순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 손학규 경기도지사 일행은 반가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투자유치협정 100번째가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자동차부품업체인 FCI사는 경기도 화성에 공장 건립을 약속했고 지사 일행은 모든 행정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확인서에 도장을 찍었다. 마침 창문으로 신노동법(CPE)을 반대하는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는 광경이 들어왔다. 그 구호는 100번째 기업, 총 135억 달러 투자 유치를 축하하는 환호로 들렸을까, 아니면, 위장취업의 원조 격인 손 지사 자신의 변신을 규탄하는 소리로 들렸을까.

며칠 뒤 4월 27일 경기도 파주, 세계 최대 LCD 공장의 준공식이 거행됐다. 최첨단 7세대 액정화면 생산기지가 애초의 투자 예정지였던 중국에서 파주로 이전한 것은 지방정부의 근성 덕분이었다. "그렇게 생떼를 쓰시더니 이제 만족하십니까"라는 노무현 대통령 식 축하 어법에 귀빈석에 앉아 있던 손 지사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답례했다. 그것은 전 세계를 누비며 투자기업을 설득시킨 4년의 긴 여정, 지구 14바퀴를 돌고도 남는 그 험난한 유격전을 마감한다는 겸손한 몸짓이었다. 100여 개의 외자기업은 경기도민에게 8만 개의 일자리를 선사했고, 향후 10년간의 성장 동력을 예약했다.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런 사례들은 종종 눈에 띈다. 그런데 지방정부가 일자리정치에 전념하는 동안 중앙정부는 '이념정치'에 발목을 잡힌 듯한 인상이다. 군경 합동훈련을 방불케 하는 진압작전이 감행되었던 5월 4일의 평택. 시위대에 쫓기는 군대나 진압군의 방패에 짓눌리는 시위대의 모습은 모순 그 자체였다. 누대를 살아온 터전을 등지고 서산 농장으로 향하는 농민들의 쓰린 마음을 달래는 시위였다면 국민의 정서가 조금 움직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농민은 반미투쟁의 숙주(宿主)였고, 대추리의 항전(抗戰)은 참여정부의 '배신'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 당혹스러움이 주사파 성향의 일부 정치인과 국회의원을 침묵하게 만들었는데, 애꿎은 국방부가 이념전의 해결사 노릇을 해야 했다.

이념정치가 참여정부의 믿음대로 '반듯한 국가'를 만들지는 모르겠으나 이념의 덫에 자주 걸리는 것을 목격한다. 그래서인지 집권여당과 야당의 정치인들이 일자리 창출을 위해 숨가쁘게 뛰었다는 얘기를 아직 듣지 못했다. 서비스국가의 기초를 다져가는 지방정부로부터 중앙의 실세 정치인들이 배워야 할 때가 아닌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