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틀어지는 미국·러시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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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한 직후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아주 좋았다. 그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하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을 적극 도왔다. 같은 해 11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푸틴을 크로퍼드목장으로 초대해 "세일즈맨을 집 안에 가끔 들일 수는 있지만 초청은 오직 친구만 한다"며 돈독한 관계를 과시했다.

이랬던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최근 들어 갈수록 틀어지고 있다. 두 나라는 '민주주의 확산', 이란 핵 문제 등을 놓고 사사건건 충돌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최근 "양국 사이에 신(新)냉전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 "푸틴이 민주주의 퇴보시켜"=딕 체니 미국 부통령은 4일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열린 '발트해-흑해 지도자 국제포럼'에 참석해 "러시아 정부가 종교.언론에서부터 사회단체.정당에 이르기까지 시민사회의 많은 분야에서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인 가스프롬이 올해 초 우크라이나에 가스 공급을 일시 중단한 것을 지적하며 "에너지 자원을 공갈 수단으로 사용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체니는 또 5일 방문한 카자흐스탄에선 "푸틴이 민주주의를 퇴보시키고 있으며, 에너지 자원을 유럽에 대한 정치적 압박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직설적으로 비난을 퍼부었다.

◆ "미국이 우리를 포위하려 한다"=러시아는 체니의 발언에 즉각 반박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공보부수석은 블룸버그 통신과의 통화에서 "오히려 체니 부통령이 이웃 국가를 공갈, 협박하고 있다"며 "그의 발언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저하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러시아 경제지 코메르산트는 "미국이 발트해에서 카스피해에 이르는 지역에 반(反)러시아 라인을 설치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1946년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가 미국에서 "유럽이 (소련이 친) '철의 장막'으로 분할돼 있다"며 경계심을 촉구했던 사실을 떠올리며 "체니는 처칠을 연상케 한다"고 보도했다. 모스크바의 미국.캐나다연구소 소장인 세르게이 로고프는 워싱턴포스트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그루지야.벨로루시를 상대로 한 미국의 민주주의 확산 전술을 (러시아에 대항하는) 트로이의 목마 전술로 본다"고 말했다.

◆ 미국과 러시아, 곳곳에서 충돌=미국은 그동안 러시아 주변국을 파고들었다. 2004년 우크라이나 대선에서 친서방 야당 후보 빅토르 유셴코의 오렌지혁명을 지원했다. 유셴코는 대통령이 되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을 추진했다. 러시아는 천연가스 공급 일시 중단이란 위협카드로 대응했다. 그 여파로 3월 총선에서 유셴코는 무너졌고, 친러시아 정당이 승리했다.

이란 핵 문제에 대한 양국의 이해관계도 다르다. 러시아는 이란과 끈끈한 경제적 유대를 맺고 있어 미국의 뜻대로 대이란 제재에 동조할 리 만무하다. 양국이 이처럼 곳곳에서 충돌함에 따라 관계는 더욱 악화하고 있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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