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리수사, 빠를수록 좋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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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종전의 검찰은 5공 비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자질구레한 사건에서도 여론이 들끓고 세인의 관심이 집중되면 검사와 수사관을 대거 차출, 보강하고 떠들썩한 밤샘 수사로 사건의 밑바닥까지 훑어봤다. 그러나 이번 5공 비리수사에서는 국정감사의 열기와 톤이 그처럼 높았고 국민의 빗발치는 응징요구와 격앙된 분위기에도 아랑곳 않고 수사의 기민성도, 단호한 자세도 찾아보기 어렵고 주변 눈치만 보는 인상이다.
그전엔 무슨 풍문만 나돌아도 곧장 정보수집에 나서고 내사에 이어 수사에 착수하던 검찰이 어쩐 일인지 머뭇거리는 인상이고 정작 수사를 착수한 대형사건마저 시기를 놓치고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핵심인물들이 해외로 나가는 사태를 빚어내고 ,있다.
검찰은 그 동안 국정감사기간에는「내사 중」이라며 수사착수를 미루기만 하더니 수사착수 후에도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세림개발 대표이자 전기환씨의 측근인물이 검찰의 출국금지처분 하루 전에 미국으로 도피하고 27명이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검찰의 이 같은 미지근한 늑장수사로 증거를 조작하거나 인멸할 충분한 시간을 벌어준 셈이고 완벽한 방어 태세를 갖추도록 하는 어이없는 결과를 낳았다.
더욱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수사대상의 축소다. 전기환씨만 하더라도 이른바 「용산 마피아」라는 별명이 나붙을 만큼 경찰 고위층 인사개입에서부터 각종 이권에 이르기까지 온갖 의혹이 붙어 다니는 데도 기껏 세림개발에 대한 세무 사찰에 착수하는 등 미온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삼청교육대 사건이나 국정감사에서 장세동씨까지 거명된 부실기업정리, 요즘 연일 언론이 파헤치고 있는 불법적인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대량 해직사건 등은 아예 검찰이 밝힌 수사대상 목록에서조차 들어있지 않다.
전두환·이순자씨의 개인비리 수사는 그렇다하더라도 지난 국정감사에서 제기된 최대의 의혹사건마저 수사선상에 올리지 않은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누누이 지적하지만 오늘날, 국가와 정부가 시급히 해결해야할 최대 당면과제는 5공의 청산이다. 5공 청산이 늦으면 늦을수록 국가적 소모와 낭비는 쌓이기만 하고 정부·여당의 부담은 가중된다.
그뿐 아니라 청산작업이 자칫 잘못될 경우 예측치 못할 국가적 불행과 재앙을 초래할 위험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벌써 그러한 경우는 대학생들의 대구지검 점거사건에서도 나타났고 학원가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서도 잘 알 수 있지 않은가.
5공 시절에 저질러진 일들은 어떻게 보면 정치적 사건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마지막 정리는 사법적으로 처리되고 마무리될 수밖에 없다.
사법이라는 창구와 제도를 통해 또는 사건들이 총 집결해 이곳에서 여과되고 심판을 받음으로써 구시대를 마감하고 진정한 새 시대를 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검찰의 사명은 막중하고 나라의 틀과 비뚤어진 기둥을 바로 세우고 초석을 다지는 중대한 과업이다.
더군다나 검찰의 입장을 보더라도 이번 5공수사가 지금까지 정권의 시녀니, 도구니 하는 온갖 오욕과 불명예를 씻고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이번 수사에서도 검찰이 눈치수사니, 눈가림 수사나 하는 축소와 미지근한 수사를 되풀이한다면 아무도 용납치 않을 것이다. 5공 비리척결의 확고한 자세와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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