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선각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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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울의 중심이 광화문 네거리라면, 영국 런던의 한복판은 피카딜리서커스라는 작은 광장이다. 극장과 영화관이 즐비한 문화 중심지다. 이 광장에는 1893년에 세워진 작은 분수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활 쏘는 천사상이 서 있다. 시민들이 에로스상이라 부르는 이 동상은 런던의 상징으로 통한다. 관광안내 책자에 빠지지 않는 것은 물론 이 도시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이브닝 스탠더드는 그 형상을 회사 로고로 삼았을 정도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 에로스를 연상시키지만 실제로는 그의 동생인 안테로스의 모습이라고 한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을 상징한다. 현지에선 이 조각상을 기독교 자선 천사로 부르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분수대와 천사상은 19세기 박애주의자로 이름 높았던 앤서니 애슐리쿠퍼(1801~1885)를 기리는 조형물이기 때문이다. 백작 작위가 있어 샤프츠베리 경으로 불린 그는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이 노동자를 보호하는 운동에 헌신했다. 그가 25세에 하원의원으로 첫 당선했을 때 어린이들은 나이 불문하고 아무 공장에서나 일해야 했으며, 공장법(Factory Act)에 따라 하루 12시간의 노동만 하도록 제한됐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으로 19세기 말에는 10세 미만 어린이의 노동이 법적으로 금지됐고, 10~14세 어린이는 성인 근로시간의 절반을 넘겨 일할 수 없게 제도화했다.

'불량직업 잔혹사'(한숲 펴냄)라는 책에 따르면 당시 어린이 노동자들은 방적기 아래를 기어다니며 움직이는 기계 사이에 이물질이 끼지 않도록 청소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힘들고 위험한 그 시절 '근로조건 최악의 직업'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이가 샤프츠베리 경이다. 지금도 활 쏘는 천사의 눈을 통해 피카딜리 광장의 아이들을 지켜주고 있을 것 같은.

한국에도 이에 못지않게 자랑스러운 인물이 있다. 1923년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 선생이다. 국제연맹이 '아동 권리에 관한 제네바 선언'을 채택해 국제기구론 처음으로 어린이 보호를 호소한 게 24년 9월이었으니 소파는 대단한 선각자다.

그는 첫 어린이날에 뿌린 전단에서 어른에게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 보아 주시오"라고 부탁했고, 어린이에겐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라고 당부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대목이다. 이런 인물의 동상을 서울 한복판 광화문 네거리에 세워야 하는 게 아닌가도 싶다. 오늘이 84주년 어린이날이다.

채인택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