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분양가 원가 공개’ 공약했지만 “장사 원리에 안 맞아” 철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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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원가 공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정부 때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때 ‘분양가 원가 공개’로 아파트 가격을 낮추겠다고 공약하며 군불을 지폈다.

MB는 “기름값 묘하다” 정유사 압박 #최중경 “회계사 출신인 내가 계산” #국민들 “세금 내려라” 역풍만 불러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2004년 “장사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며 부정적인 입장으로 선회했다. “장사하는 것인데 10배 남는 장사도 있고 10배 밑지는 장사도 있다”며 “경제계나 건설업계의 압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소신”이라며 시장의 원리를 존중하는 발언도 했다.

그러자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의 김근태 원내대표가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여권 내부의 반발에 밀려 노 전 대통령은 소신을 접고 한발 물러섰다. 그래서 나온 게 일종의 우회적인 원가 공개 방식인 ‘분양가 상한제’다. 하지만 이후 건설사들이 주택 공급을 줄이면서 전세대란을 부르는 등 부작용이 커지자 제도는 결국 껍데기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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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권 때도 ‘원가 공개’ 카드로 기업을 압박했다. 2011년 이른바 ‘기름값 소동’이 그 예다. 당시 국제유가가 내린 만큼 국내 휘발유 가격이 떨어지지 않자 이 전 대통령은 “기름값이 묘하다”는 화두를 던졌다. 윤증현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이 “주유소들은 가격이 공개돼 투명한 경쟁을 하지만 정유사들은 그러지 않는다”며 거들었고, 최중경 당시 지식경제부 장관은 “회계사 출신인 내가 직접 기름값 원가를 계산해 보겠다”며 총대를 멨다.

몇 달간 정유사들을 압박하고 조사에 나섰지만 성과는 없었다. 정유업체를 닦달해 3개월 시한으로 L당 100원씩 강제로 기름값을 내려 체면치레한 게 전부다. 되레 ‘기름값의 절반 이상인 세금이 주범’이라며 유류세를 인하하라는 역풍을 맞기도했다.

국내 주요 기업들은 원가 공개와 관련해  ‘분양가 원가 공개 논란’과 ‘기름값 소동’이 아직도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다. 원가에는 비용 절감을 위한 기업의 경영전략이 녹아 있는데, 이를 밝히라는 것은 기업의 핵심 비밀을 공개하라는 뜻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의 전방위적인 원가 공개 압박은 이를 통해 가격을 통제하겠다는 정부의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게 재계에서 나오는 해석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사장은 “마진을 99%로 잡아도 잘 팔리는 제품이 있고, 원가 이하로 가격을 내려도 안 팔리는 제품이 있다”며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원가가 아니라 소비자의 수요”라고 말했다.

원가 공개로 압박해 봤자 실효성이 떨어지고, 시장의 자율조절 기능만 마비시킨다는 우려도 나온다. 나아가 원가 공개 압박이 계속되면서 기업의 다른 영업·기술 기밀에 대한 공개 요구도 거세질 수 있다. 유환익 한국경제연구원 혁신성장실장은 “원가 공개가 이뤄지면 기업의 창의적인 원가절감 노력이 줄어들게 된다”며 “기업 경쟁력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세종=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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