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의 삶」 통해 사회 고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K-2 TV주말연속극『은혜의 땅』(윤혁민 작, 김연진 연출)은 지금껏 외면당해 왔던 서민들의 거친 삶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드라마는 주말의 황금시간대에는 유한계층의 무분별한 사랑놀음을 그린 통속멜러물이 제격이라는 오랜 불문율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일단 높이 평가할만하다.
서울의 변두리인 시흥2동 산동네는 이 드라마의 주무대. 이곳 주민들은 50가구가 2개의 간이변소를 사용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가장의 수입이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기 때문에 부녀자들은 하루종일 마늘을 까서 1천5백원을 버는가 하면 개를 키워 식용으로 내다 팔기도 한다.
모든 등장인물이 하루하루를 온몸으로 살아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업자가 아내에게 10만원을 건네준 것이 문제가 돼 28년간 몸담아 온 직장을 하루아침에 잃고 옥살이까지 하는 말단 공무원 유일봉.
가난을 이유로 늙고 돈 많은 재일동포에게 엄연한 처녀를 결혼시키려는 가족과 가족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내키지 않는 결혼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은혜.
검사인 아들을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려는 김 회장과 무고한 사람이 사형당하도록한 과오를 저지른 뒤 양심의 가책을 받아 성과 이름마저 바꾸고 육체노동자가 된 독고빈.
운동권의 대부에서 허무주의 시인으로 변한 나문세와 그의 허위의식에 절망하며 헤어지려는 애인 은숙. 그리고 존경했던 선배가 민중시대의 도래를 부정하자 분노하는 후배들.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개인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현실세계를 지배하는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로 인해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점에서 행·불행, 희·비극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환원시켜 왔던 종래의 통속적인 멜러드라마와는 성격을 분명히 달리한다.
또 이들이 거대한 억압과 폭력에 의해 번번이 당하기는 하지만 결코 무릎꿇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이 드라마의 주제가 매우 건강하다는 판단을 가능케 해준다.
50대의 무능한 가장 유일봉은 군더더기 식구가 많다고 불평하는 아내에게 『남들이 다 외면해도 내가 돌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가족』이라고 비장하게 내뱉는다. 이로써 그는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도피하는 대신 치열하게 싸워 나가려는 의지를 내보이는 것이다.
검사시절에 독고빈이 무고한 사람을 사형에 이르게 한 고문에 대해 『인간이 인간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짓』이라고 절규하는 대목에서 이드라마의 사회성은 절정에 이른다.
등장인물들은 「구조적인 폭력」앞에서 일시적으로는 무너지지만 오히려 불행을 통해서 인간성을 회복하고 더욱 강한 모습으로 일어서고 있다.
이 드라마에 있어서 아쉬운 것은 일정한 편견을 가진 지식인·소시민의 눈으로 밑바닥 사람들을 바라봄으로써 그들의 독자적인 세계와 가치관을 충분히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주가 되고 삶의 터전을 계속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단순한 배경이나 소품정도의 역할에 머물게 된다면 결국 민중들의 치열한 삶은 상업주의적인 제작동기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이하경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