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31본…장애이긴 오똑이 인생|장애자올림픽 척수장애 1백m서 금메달 딴 유희상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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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도둑질과 구걸 빼놓고는 안 해본 것이 없어요. 이젠 낮선 곳에 혼자 버려져도 굶진 않을 자신이 있읍니다.』
장애자 올림픽 남자 척수장애 1백m 금메달리스트 유희상씨(28).
매몰찬 세파에 6년 동안 31번이나 직장을 옮겼다. 그러나 그때마다 좌절을 딛고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올림픽 금보다 값진 「인생의 금메달」.
3남1녀 중 차남인 유씨는 2세 때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못쓰는 불구가 됐다. 아버지(59)의 사업마저 실패하는 불행이 닥쳤다. 학교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17세에야 광명시의 재활학교 명휘원에 들어갔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성격이 꼼꼼한 그는 목공예를 택했다. 82년 졸업과 함께 얻은 첫 직장은 군포 나환자촌 안의 소규모 가구 하청공장.
『은사소개로 물어 물어갔더니 주인의 첫마디가 「달리 갈곳이 없느냐」는 거였어요. 「아무 데도 없다」고 했지요』
밤10시까지 일을 했으나 석 달이 지나도록 월급을 안 줬고 갖고 온 돈도 다 떨어져 항의를 했더니 『데리고만 있어달라는 소개였다』는 것이 주인의 대답.
한바탕 싸우고 그만둔 뒤 친구소개로 다시 부천의 공예가구공장에 들어갔다.
생활비를 아끼려 공장다락방에서 잤다. 능력 급수당제여서 야근까지 해 한 달에 20만원 가량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이때가 최고의 직장이었어요』그런데 6개월만에 일본서 열리는 장애자올림픽선수로 출전통보를 받았다. 휴가원을 냈으나 거절, 사표를 냈다. 경기용이 아닌 환자용 휠체어를 탄 유일한 선수로 3백50명 중 47등을 했다.
이듬해 LA올림픽에도 출전했다. 이번엔 5등 『운동을 해봐야 생계대책이 세워지는 것도 아니어서 포기하기로 했읍니다』
이후 유씨의 직장유람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전자부품공장·목공예공장·가구공장·리어카행상·노점상….
『한쪽 발만이라도 성했더라면…』부질없는 생각도 했다. 지난 해 9월의 정부의 목공예공장을 그만둔 뒤 다시 유씨는 실직자가 됐고 올해 5월 장애자 올림픽선수로 뽑혀 합숙훈련에 들어갔다.
유씨의 꿈은 안정된 직장을 얻어 떳떳한 한 시민으로 사는 것. 부모와 3남1녀 형제가 상봉2동 집에서 아버지의 노동수입으로 어렵게 살고있다. <민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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