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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고통의 한반도, 우리는 시대의 지성을 잃었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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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지난해 4월 스승 최인훈을 찾은 서울예대 시절 제자들. 오른쪽부터 소설가 신승철·하성란·박정윤·최인훈, 제자 유인호씨. 최인훈은 엄한 스승이었다. [사진 신승철]

지난해 4월 스승 최인훈을 찾은 서울예대 시절 제자들. 오른쪽부터 소설가 신승철·하성란·박정윤·최인훈, 제자 유인호씨. 최인훈은 엄한 스승이었다. [사진 신승철]

선생님께서 암 투병 중이시라는 말을 듣고 병원으로 찾아뵌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폭염 속에서 선생님의 부고를 받고 잠시 더위를 잊었습니다. 하늘에는 작열하는 태양 대신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시대의 고난과 슬픔을 응축시킨 지성의 별이 잠시 반짝이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큰 문이 닫히는 소리가 음울하게 들리는 듯도 했습니다.

최인훈 선생님을 보내며 … #해방·전쟁·이념갈등 진실된 기록 #지금 다시 제대로 읽겠습니다

책 '광장', 최인훈 지음.

책 '광장', 최인훈 지음.

선생님은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셔서 평화로운 유년 시절의 체험도 했고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교육도 받으셨습니다. 아홉 살에 해방을 맞이하여 5년 동안 원산에서 학교도 다녔고, 공산 치하도 체험하셨습니다. 그리고 1950년 12월 원산 철수의 대열에 끼어 월남하셨습니다. 월남해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지만 공부보다는 문학에 뜻을 두었고, 1959년에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로 작가의 길에 나섰습니다. 1960년 4·19를 겪고 이듬해 ‘광장’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으며 70년대에는 한국 희곡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 동구의 붕괴와 밀레니엄의 전환기를 맞이하여 『화두』를 집필하셨습니다. 1994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화두』는 20세기 후반 역사, 정치, 문화, 일상 전반에 대한 선생님의 기억이며 기록입니다. 선생님의 삶은 20세기 후반의 격동을 상징하며, 선생님의 문학은 그 시대, 그 삶에 대한 치열한 지성적, 문학적 탐구였습니다.

선생님은 시대에 휩쓸려 가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를 응시하는 사람이셨습니다. 일제 치하를 살고 보았으며, 공산 치하를 살고 보았으며, 자유당 치하의 혼란과 부패를 살고 보았으며, 4·19와 5·16, 그리고 경제 성장과 동구의 붕괴를 살고 보았던 분이십니다. 엄정한 시선과 지성으로 그 세월들을 보았고 기록해 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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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아직도 20세기 후반의 혼돈과 비극과 이념의 자장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이제 우리는 그 시대의 고통과 아이러니를 증언해주실 수 있는 가장 진실된 분을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으로 허탈스럽게도, 우리가 살지도 않았고 보지도 않았던 것들에 대한 엉터리 진실게임을 하느라 허둥댈 뿐입니다. 우리가 선생님을 잃어버린 것은 20세기 후반의 진실에 대한 좌표를 잃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20세기의 거짓을 팔아 21세기에 이름과 재물과 권력을 얻기도 했으나, 선생님의 21세기는 상대적으로 초라했고 외로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쓸쓸하게 우리의 곁을 영원히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이라도 제정신을 차리려 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총독의 소리』와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와 『광장』과 『화두』 같은 선생님의 글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선생님은 공룡 꼬리의 비늘 한 개로써 이 세상을 증언한다고 하셨지만, 그 한 개의 비늘 속에는 공룡 전체는 물론 이 세계까지도 담겨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제대로 읽어 내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몫입니다. 선생님의 지성은 21세기 우리들에게 더욱 요청되는 것입니다.

이남호 고려대 교수·문학평론가

이남호 고려대 교수·문학평론가

선생님이 떠나가신 세계는 20세기 후반의 한반도와는 많이 다른 세계이기를 기원합니다. 그곳은 선생님의 생각이 무시되는 곳이 아니라 선생님이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 엄청 무거운 생각의 짐 부려놓고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이남호 고려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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