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포위망 속 공포 쏘며 최후 발악|북가좌동 인질국 14시간…침입에서 소탕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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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토요일 저녁 건넌방에서 한가하게 TV를 보고있던 경숙·대경양 자매는 밤 10시쯤 슬며시 방문을 밀고 들어오는 불청객을 보고 소스라쳤다.
양복·점퍼차림의 단정한 용모에다 여자까지 한명 낀 4명이 권총을 꺼내들고 있었지만 여자가 끼어있어 탈주범인 줄은 생각도 못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가발· 스커트를 벗어 던진 범인들은 이들 자매를 어머니·남동생이 잠자던 안방으로 끌고 가 『우리는 탈주범들이다. 월요일까지만 머무르다 가겠다』고 위협했다.
어머니 김씨(52)가 『당신들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음료수를 가져다주고 과일을 깎아주자 범인들은 안방에서 가족들과 함께 먹으며 다소 부드러워졌다.
이들 자매가 『오빠, 오빠』하며 따르자 범인들은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 보라』며 탈주동기는 『1심 형량이 너무 많아 중형을 내린 놈을 처단하러 나왔다』고 태연히 대답했다.
범인들은 마치 한가족처럼 TV주말영화를 고씨 가족들과 함께 시청하거나 음악을 들었다.
아버지 고씨(50)가 술에 취해 대문을 들어선 것은 16일 0시30분쯤.
술이 많이 취한 고씨가 『집에 양주가 있으니 우리 한잔하자』며 『젊은 사람들이 왜 자수를 않느냐』고 자수를 권유하차 범인들은 화를 벌컥 내며 『이××, 간덩이가 부었구만』하며 거칠게 떠밀어 고씨는 장롱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치고 나동그라졌다.
범인 중 지강헌과 강영일은 물 컵에 양주를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으며 한의철과 안광술은 술이 약한 듯 몇 잔 마신 뒤 꾸벅꾸벅 졸았다.
담요를 뒤집어 쓴 채 자는 체하고 있던 고씨는 새벽 4시쯤 범인들의 코고는 소리에 살며시 담요를 걷어 범인들이 술에 취해 마루·안방에서 곯아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현관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며 『강도야』라고 소리쳤다.
고씨가 집을 빠져나간 사실을 모르던 범인들은 20분쯤 뒤 큰딸 선숙양이 화장실 가는 기척에 잠을 깼다. 창가로 가 경찰이 이미 집 주위를 포위한 것을 확인한 범인들은 곧바로 가족 6명을 길가 창문이 있는 건넌방으로 끌고 가 공포 한발을 쏘며 대치 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범인들은 충혈된 눈으로 창살에 매달려 밖을 응시하다 오전 5시쯤 경찰병력이 계속 증원되자 『씨×놈들 모조리 죽인다』며 창 밖을 향해 권총한발을 쏘았다.
오전 7시에는 안광술이 둘째딸 경숙양(19)의 옆구리에 부엌칼을 들이댄 채 마당 장독대에 올라 집 앞 골목길과 옆집 베란다 등에 배치된 경찰을 둘러보며 『모두 철수시켜라. 쏴 버리겠다』며 5분 동안 모습을 나타냈다.
오전 8시쯤부터 범인들은 방안의 전축을 틀어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사과를 가져다먹으며 연신 줄담배를 피워댔다.
9시쯤 갑자기 험악해진 지가 선글라스를 낀 채 창가로 나와 『처자식들을 버리고 가 신고한 놈(집주인 고씨 지칭) 좀 오라 그래.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마』라고 소리치자 안쪽에서 갑작스레 딸들의 울부짖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인질들을 곧 해칠 것 같은 팽팽한 긴장속 지의 미치광이 같은 독백이 계속됐다.
『우리는 성적욕구까지 억제하며 떳떳하게 도망을 다녔는데 그게 아니었어…』
『경찰 놈들, 그렇게 비상을 쳐놓고도 우리를 못 잡으면 간첩은 어떻게 잡느냐』『돈 있으면 판·검사도 살수 있는 더러운 세상이다. 이 새끼들아』
범인 가족들이 설득하다못해 『한번만 만나서 얘기하자』며 담을 넘으려 하자 이들은 더욱 포악해지며 총을 겨누고 인질들의 목에 칼을 대 누르는 등 극도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지는 수사본부관계자에게 『12시까지 차를 대기 시켜라. 공기 좋은 산이나 강에가 죽고 싶다』고 요구한 뒤 『대한민국을 사랑한다』 『나는 마지막 시인이다』는 등 횡설수설을 계속했다.
오전11시37분 강이 둘째 딸 경숙양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강은 대문 밖 골목길에 3중으로 늘어선 경찰포위망을 인질을 대동한 채 유유히 둘러본 뒤 다시 들어가 『강헌이 형, 나 자수 안 할래. 칼 하나 주고 인질한 놈 다리하나 끊어』라고 외쳤다.
강이 돌아가자 지가 강을 향해 권총 한발을 쏘았다.
동시에 『이××, 내 마지막 선물을 거절하느냐』는 지의 거치 고함과 『악-, 악-』 울부짖는 인질들의 비명소리가 함께 들렸다.
12시정각 지가 또다시 권총을 강에게 겨누자 옆에 있던 안과 한이 지의 손목을 붙잡고 총을 뺏으려다 격투가 벌어졌다.
이들의 고함과 가족들의 비명,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 뒤 『퍽』하는 소리가 두 차례 들리며 『으아 악』하는 인질들의 외마디가 잇따라 터졌다.
지로부터 권총을 뺏은 안과 한이 뒤편 안방으로가 각각 자신의 머리에 한방씩을 쏜 뒤 고꾸라진 것.
안방에 있던 셋째 딸 대경양(16) 등 인질 2명이 비명을 지르며 방을 뒤쳐 나와 집밖으로 탈출했다.
강은 이사이 『지를 내가 직접 잡겠다』며 경찰로부터 수갑을 받아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12시3분지가 다시 총을 들고 창가에 나타났다. 양손은 피투성이가 된 채 마지막 인질인 큰딸 선숙양을 붙잡고 있었다.
『안과 한이 자살했다. 나도 탄알 한발을 장전했다』고 덤덤히 지가 말하는 순간 뒷담을 통해 경찰 특공요원 2명이 권총을 들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지는 다시 전축을 틀었다. 12시16분 의자에 앉아 발을 창틀에 올려놓고 밖을 응시하던 지가 방바닥에서 깨진 유리조각을 들어 자신의 목 한가운데를 서서히 가로 그었으며 곧 시뻘건 피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12시18분 피를 흘리며 의자에 앉았던 지가 방바닥으로 털썩 쓰러졌다.
『쓰러졌다』는 선숙양의 비명이 집안에 울려 퍼졌으며 특공요원과 형사대·보도진들이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려고 몰러들었다.
순간 피투성이가 된 지가 벌떡 일어나며 권총을 겨눴다.
뛰어 넘으려던 사람들은 혼비백산 엎드렸고 동시에 특공요원 5명의 문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땅』 『빵, 빵』총성과, 『와장창』소리가 뒤범벅이 됐다.
이어 마지막 인질 선숙양이 피범벅이 된 옷을 입고 경찰의 등에 업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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