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낭만주먹 낭만인생 36. 살롱 드 방 <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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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문인·화가 친구들과 함께 한 필자(왼쪽에서 둘째). 필자 오른쪽으로 소설가 천승세씨, 화가 주재환씨가 보인다.

1971년에 차렸던 고급 맞춤옷집 '살롱 드 방'은 잠깐 사이에 국내 패션을 이끄는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그런 반응에 나도 놀랐지만, 고객들은 가게의 인테리어에 더 놀라곤 했다. 이를테면 건물 외벽은 외제 황금색 벽지로 감쌌다. 살롱 안은 천연 고목나무 테이블이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냈다. 그 위에는 손님 접대용 샴페인과 포도주를 올려 놓았다. 외국물 먹어본 티를 낸 것이다. 살롱 분위기는 35년 전에는 제법 통했던 셈이다.

방천왕둥이 할아버지의 장사 수완을 흉내 내 본 '살롱 드 방'개업 이후 소문 하나가 추가됐다. 내가 패션 1번지 파리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이라는 소문이 서울 명동.충무로 일대에 파다했다. 얼마 전 소르본대에서 동물사회학을 전공했다고 수군대더니만 경력 하나가 늘어난 셈이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도시락 싸들고 해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렇게 놀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간혹 맞춤 의상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고객이 있었다. 나는 반품받은 옷을 그들의 면전에서 싹둑싹둑 가위질해버렸다. 자신있게 새로 만들어준다는 호기였다.

하여튼 벌이가 괜찮으니 카바레나 고급 술집 나들이를 한참 동안 즐기기도 했다. 달콤했다. 당시 나는 30대의 패션 디자이너요, 노총각 신세가 아니던가.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배추, 너는 타락한 부패분자야. 이렇게 살려고 서울에 돌아온 거야?"

백기완이 나를 들볶았다. 복잡한 일은 또 있었다. '살롱 드 방'의 바로 위층은 공교롭게도 기원이었다. 한다하는 재야 인사들이 그곳과 내 살롱을 오가며 진을 쳤다. 김도현(전 문화관광부 차관).김정남(전 청와대 수석).이부영(현 정치인)과 '대륙의 술꾼' 김태선도 자주 놀러왔다.

"배추 형, 나는 상추로 할까?"

"왜?"

"형이 배추라면 상추 정도는 해야겠지?"

당시'오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시인 김지하가 소설가 신상웅, 평론가 임헌영.구중서 등 '상황문학' 동인들과 함께 들렀을 때 내게 툭 하니 던졌던 농담이다. 어쨌거나 재야인사들은 기원의 문이 열리기 훨씬 전부터 어슬렁대다가 살롱 문을 닫을 무렵 가게에 고개를 디밀었다.

아예 살롱 안까지 들어와 자장면과 배갈을 시켜 여보란듯이 술추렴도 했다. 계산은 물주인 내가 도맡았지만, 도무지 생활이 말씀이 아니었다. 내 체질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 무렵 새록새록 솟았다. 장사는 제법 되던 '살롱 드 방'을 1년여 만에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롱 드 방'을 계속했다면 나는 지금 앙드레 김 못지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하지만 그건 헛꿈이요, 내 팔자가 아니었나 보다. 가게를 정리한 뒤 미련없이 경북으로 내려갔다. 오랜 꿈이던 농장일 준비로 머슴 노릇을 시작했던 것이다.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인 철원 노느메기 농장은 그 다음이다.

배추 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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