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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정립|우리 고유의 것 세계화가 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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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약 50일간에 걸쳐 이 땅에서 열렸던 각종 문화행사는 비공식집계로 하루평균 10여건이었다. 국제연극제를 비롯하여 국제무용제·국제 야외조각심포지엄· 국제현대회화전·세계합창제·국제학술회의·국제펜대회 등으로 국제적인 문화 및 공연예술 행사가 연이었다.
한국미 특별전·한국전통 자수매듭전·한국현대미술전·국악큰잔치·한국복식 2천년전·한국 전승공예대전·민속마당놀이 공연 등으로 한국고유의 문화와 예술을 보여 줄 수 있는 행사도 많았다.
볼쇼이 발레와 소련 발레스타·모스크바 필·볼쇼이 합창단·체코의 스보시 극단과 폴란드의 가르지나차극단·헝가리의 기외르발레단 등 동구 공산국가의 공연예술이 40년의 이데올로기 장벽을 넘어 한국에 처음 소개된 것도 이번 올림픽 문화예술 축전에서였다.
이렇게 짧은 기간동안 퍼부어진 엄청난 양의 문화공세(?)를 한국인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잠재되어 있던 문화수용 욕구에 불이 댕겨진 듯한 열정으로 수용했다.
날마다 엄청난 숫자의 인파가 문화공연 행사가 열리고 있는 공연장·전시장·야외행사장을 찾았다. 한 예로 무용제의 경우 객석 점유율 평균 78%였다.
소련 발레스타·모스크바 필·코메디 프랑세즈 등 세계적인 명성의 공연예술단의 내한공연 입장권도 연이어 매진, 이러한 일반의 문화예술행사 참여 열기는 국내 작품 공연에도 번져나가 공연예술가들을 놀라게 했다.
한마디로 엄청난 문화의 충격, 특히 한국인으로는 난생 처음 대하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동구의 상업성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예술은 하나의 신선한 충격으로 한국인들에게 받아 들여졌다.
공산국가에서는 문화예술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물든 것이라는 우리의 막연한 고정관념을 넘어 그들의 인간내면의 진실한 추구에서 비롯된 높은 예술성과 철저한 프로페셔널리즘은 폭 넓은 공감대를 형성케 했다.
이렇게 익히 우리가 알고 있던 예술, 익숙해져 의식조차 되지 않은 문화, 즉 음악을 예로 들자면 독일·이탈리아식의 음악이 아닌 또 다른 음악, 소련 음악과의 만남은 한국인들에게 예술과 문화 이해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삶의 방식을 통제하는 힘을 문화라 한다면 삶의 방식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 있다. 즉 예술행위 규범의 다양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음악평론가 이강숙 교수 (서울대·음악이론) 는 얘기한다.
올림픽 문화예술 축전에서 우리 것을 외국인에게 알리기 위한 일련의 전통문화 및 예술행사는 일관된 주제와 메시지가 없어 잡다하다는 인상을 피할 수가 없었다고 비판하는 음악평론가 이상만씨는 이제부터 우리는 한국 전통문화의 적극적인 보존과 발전운동을 병행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극연출가 손진책씨 또한 64년 동경올림픽이 일본의 전통공연예술인『가부키』나 『노』를 국내외적으로 크게 알리고 발전시킨 데 비해 이번 88서울올림픽은 우리의 것을 외국인들에게 알리고 발전시킬 발판을 마련하는데 소홀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해안 풍어제를 시작으로 황해도 만구대탁굿·봉산탈춤·강후탈춤·송파 산대놀이·양주 별산대놀이 등으로 이어진 우리 민속놀이는 올림픽 문화예술 축전기간 중 잠실 석촌호수 옆 서울놀이 마당에서 열려 국내외 관람객에게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이러한 민속놀이의 예상 밖의 대 호응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증명하는 것으로 한국 전통예술을 세계에 알리고 세계화하는데 지침이 돼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짧은 기간동안 엄청난 양의 문화예술 행사를 치르면서 두드러진 문제점 또한 적지 않다는 것이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지적이다.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이 문화예술 전반에 걸친 전문인력의 부재현상.
세계의 문화예술계의 동향을 바탕으로 최소한 4, 5년 앞을 내다보며 문화예술 전반에 걸친 기획을 세우고 외국 공연단체를 초청하여 추진할 수 있는 전문적 식견과 경험을 갖춘 문화예술 행정가가 필요하다.
또한 정부는 문화예술단체를『재정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오랜 문화예술의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의 정부들이 취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아직까지 관이 계획하고 결정하고 추진하는 관주도형의 문화정책으로는 결코 바람직한 문화예술의 꽃을 피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제 문화예술의 부모상태는 벗어난 현실에서 관은 문화예술인들의 의견을 폭넓게 수용하여 정책으로 반영시키는 자세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는 긴 계획을 갖고 지속적으로 문화예술계의 육성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문화부 신설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실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민간차원에서도 각 박물관·미술관 등에서 일할 전문적 지식을 갖춘 큐레이터 등 운영인력이 부족하다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들 전문인력 양성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제 시작된 동구문화예술의 한국에의 소개를 축제기간중의 일회적인 행사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상호교류하기 위해서는 그곳 사정에 밝은 전문 「임프레사리오(흥행주)」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올림픽 후 국내 문화예술계의 전망으로 무용계는『일시적 공동화』, 음악계는『여전한 연주회 붐』, 연극계에는 『여전히 막은 오르라』, 미술계는『계속되는 전시회』를 전문가들은 예고한다.
무용가 총동원령(?)이라 할 정도로 대부분의 무용가가 올림픽 개폐회식과 무용제 등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은 만큼 당분간 규모 큰 공연은 없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일련의 올림픽 문화예술 축전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된 동구문학예술에 대한 학계의 이론적 연구가 시작되고 나아가 창작과 연주 등에도 영향을 미치리라는 전망이다.
『이제는 국내문화 예술인들도 스스로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올림픽기간 중 한국사람들이 단시일 내에 다양하고 세계적으로 수준 높은 문화와 공연예술을 폭넓게 접한 만큼 안목도 그만큼 높아졌습니다. 관객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공연이라면 관객을 모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무용평론가 이상일씨 (성대교수·독문학)는 일반의 기대수준에 걸 맞는 정도의 작품을 공연했을 때만 모처럼 올림픽 문화예술 축전을 계기로 불러모았던 관객들을 계속 극장에 붙들어 둘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올림픽 후의 우리 문화예술계의 새로운 과제로 등장한 것이 한국고유의 전통문화와 예술의 세계성의 획득이다. 동구문화가 우리에게 준 문화충격을 계기로 서구문화 지향의 현실을 반성하고 우리 고유의 문화예술의 전통을 찾아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전통문화의 세계성 획득이라는 것은 세계인 특히 서구인의 양식에 맞춰 우리 것을 개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것 나름의 독특한 개성을 발굴하고 닦아 춤이면 춤, 음악이면 음악 본래의 아름다움을 추구할 것』을 이강숙 교수는 강조한다.
노랑·빨강·파랑색으로 한국전통의 원색이 난무하여 일부 인사들로부터 세련되지 않은 촌스러운 배색이라고 비판을 받았던 올림픽 개·폐회식장의 의상 빛깔 배합이 상당수의 외국인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는 것은 앞으로 세계화를 향한 우리문화의 향방을 지시하는 한 이정표가 되리라는 것이다.
세계적인 수준의 올림픽문화 예술축전을 치르고 난 지금, 우리는 종전처럼 외국의 문화예술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던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신을 갖고 우리 문화예술을 해외에 알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문화적 자긍심을 갖고 우리문화·우리예술을 해외에 알리고 외국 것을 수용할 때 우리는 세계 속에서 확실한 좌표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올림픽 문화예술 축전에서 2천 4백년 역사의 그리스비극『오이디푸스왕』, 3백여년 역사의 프랑스 코메디 프망세즈의 『서민귀족』, 역시 3백년 역사의 일본의 전통연극 『가부키』가 각 나라가 자랑스럽게 해외에 소개하는 세계적 명성의 공연물이라는 사실은 이를 실증한다.
『올림픽문화예술 행사장을 열심히 쫓아다니다 보니 역시 한국인이 할 일은 국악이고 우리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가야금 전공의 이재숙 교수(서울대·국악)의 말은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고 하겠다.

<박금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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