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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파헤친 "성폭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성폭력에 의한 가정붕괴는「가정파괴 범」때문만이 아니라 회피와 방관으로 점철된「가족구성원들의 철저한 에고이즘」이 주범임을 고발하는 한편의 연극이 가을무대에 올려진다.
중앙일보사와 극단 산울림이 공동주최, 9∼17.일 호암아트홀에서 12차례 공연을 갖는『덫에 걸린 집』.
『위기의 여자』『숲속의 방』『하늘만큼 먼 나라』『웬일이세요, 당신』등을 통해 가정문제에 높은 관심을 보여왔던 극단 산울림이 가정문제시리즈 제5탄으로 선보이는 이 작품은 성폭력으로 인한 가족갈등을 다룬 것 작품이어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정복근작·임영웅연출의『덫에 걸린 집』은 모대학교수 자택인 아파트에 침입, 남편이 보는 앞에서 부인을 집단 폭행했던 강도 중·1명이 경찰에 붙잡혀 사건이 노출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남의 눈이 두려워「없었던 일」로 묻혀 두려했던 이일이 밝혀지게 되자 가족들은 피해당사자가 해결해야할 문제라며 증언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여행을 떠날 것을 종용한다.
시누이부부의 은근한·모멸, 친정어머니의 노골적인 수치감까지 겹쳐서 정신적인 방황을 거듭하는 아내에게 정작남편은 방관하는 자세만을 취함으로써 아내를 더욱 외롭게 만든다.
이처럼 남편의 문제회피 그늘에는 정신대 출신이었던 어머니와, 무서운 산짐승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기르던 개까지 던져주었던 어린 시절의 끔찍한 기억이 그림자로 남아있다.
결국 아내는 너그러움으로 포장됐던 주위 가족들의 침묵이 사실은 부정한 여자와 관계없기를 바라는 극도의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깨닫고, 자신 역시 애써 이 같을 사실을 외면하려 했음을 알게된다.
아름답게 치장된 가식보다는 솔직한 것을 절규하면서 남편에게 이혼서류를 내던진 채 여행길을 떠나는 것이 극의 기둥줄거리다.
이 작품은 이미 지난5월『오장군의 발톱』과 함께 문예진흥원추천 창작희곡으로 선정된바 있는데,『위기의 여자』『웬일이세요, 당신』동을 통해 부부문제를 극화하는데 호흡을 맞춰온 정-임 콤비가 6차례나 수정작업을 더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
연출자 임영웅씨는『천재지변 같은 가정파괴 범을 붙잡아 벌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해자를 보호, 위로하지 않고 당사자 개인문제로 돌려버리려는 가족들의 에고이즘이 극복되지 않는 한 피해자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면서『정신대·임진왜란 등 지금까지 외면해왔던 여성수난들을 현대의 가정파괴 범에게까지 연장시켜야할 것이냐는 물음에 초점을 맞췄다』고 연출의도를 설명했다.
남편역에 정동환(39), 아내역에 김순이, 시누이부부에 연운경(35)·이호재(47), 장모역에 반효정(46), 어머니역에 김정(37), 형사역에 이호성(35)씨 등이 출연, 1시간20분간 탄탄한 연기력을 과시한다.
『여성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아요. 모성이니까요』라는 아내의 외침은 어쩌면 숨어있는 모든 여성들의 한스러운 목소리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 연극은 보여주고 있다.

<홍은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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