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취재일기

한국 뺀 부시·탈북자 면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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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백악관에서 탈북자 김한미(7)양 가족을 만나는 자리에 한국 특파원들은 들어갈 수 없었다. 교도통신 등 일본 특파원들만 출입이 허용됐다. 백악관 측은 "부시 대통령이 지난해 탈북자 강철환씨를 만난 날이 '한국의 날'이었다면 오늘은 '일본의 날'이라고 생각해 달라"며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이 면담한 사람은 한국인이 5명(한미양과 부모, 정성산 뮤지컬 감독,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국장)인 반면 일본인은 2명뿐이었다. 납북 피해자 요코타 메구미의 어머니 사키에와 메구미의 남동생 다쿠야였다. 5 대 2였지만 이날의 주인공은 두 일본인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30여 분간 면담을 끝낸 뒤 북한의 메구미 납치에 비난을 집중했다. "한 나라의 지도자(김정일)가 어린이(메구미) 납치를 조장했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 "북한은 이 어머니와 사랑하는 딸을 갈라놓는 비정한 짓을 저질렀다. 속히 딸을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워싱턴포스트 등 주요 언론의 헤드라인은 일제히 "부시, 납북 일본 소녀의 어머니를 만나다"로 뽑혔다. 한미양 얘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면담에 가토 료조(加藤良三) 주미 일본대사가 배석한 것도 이날의 만남이 일본판이었음을 입증했다. 가토 대사가 이끄는 주미 일본대사관은 워싱턴 정가에 일본인 피랍자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열성적으로 로비를 펼쳐왔다. 지난주 미 하원이 처음으로 일본인(사키에)을 출석시켜 납북자 청문회를 연 것이나 부시가 사키에를 만난 것은 다 그 결실이다.

사키에는 백악관 방문에 앞서 일본 외무성과 주미 대사관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미 국가안전보장회의 (NSC)고위 관계자 등을 잇따라 만나며 유명 인사로 떠올랐다.

반면 정부의 외면 속에 워싱턴에 온 한국의 탈북자와 납치 피해자들은 별 조명을 받지 못했다.

북한 인권 문제에 관한 한 주미 한국대사관은 말을 매우 아낀다. 정부의 지시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북한의 인권상황은 우려하지만…"으로 시작되는 '답변 지침'만 반복해야 한다. 백악관이 5명의 한국인을 초청하면서 대사관 관계자를 배석시키지 않은 건 이 말이 듣기 지겨워서였는지도 모른다.

강찬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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