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노조 달래기용 뒷돈 제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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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밤 구속영장이 발부된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서울구치소로 향하는 차량에 앉아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김성룡 기자

현대.기아차그룹의 임직원들이 수백억원대의 비자금을 노조 관리비와 정치자금 등으로 사용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28일 확인됐다. 하지만 검찰은 1300억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는 정몽구 회장에 대한 비난 여론을 막으려는 의도가 포함된 것으로 판단하는 분위기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정 회장이 불법으로 조성한 비자금을 정의선 사장의 경영권 승계 등을 위한 사적 자금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진술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다"=검찰 등에 따르면 김동진 현대차 부회장 등은 비자금 사용처와 관련해 "해마다 노조위원장 등 노조 간부에게 40여억원을 건넸다"고 진술했다. 또 노무 담당 임직원들을 통해 노조에 각종 명목으로 금품을 제공하는 등 연간 70억~80억원을 '노조 관리비'로 지급해 왔다고 검찰에서 밝혔다. 현대차 관계자도 "생산 차질을 막기 위한 일종의 '노조 달래기용'으로 이 돈을 사용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회계처리를 제대로 할 수 없어 비자금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진술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현대차 노사가 '검은 밀월(蜜月)' 관계를 맺어 온 것으로, 그릇된 노사 관행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된다.

김 부회장 등은 또 1년에 세 차례 정도 임원들의 연봉 보전을 위해 차원에서 비자금을 사용하는 등 5년간 100억원가량을, 여수 엑스포를 유치하는 데 100억원 이상을 썼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차 임직원들은 이와는 별도로 "비자금 중 상당 금액을 정치자금으로 줬다"고 검찰에서 밝혔다. 검찰 조사 결과 현대차 본사와 글로비스가 2002년 조성한 비자금은 480억원에 이른다. 특히 글로비스 비자금은 대통령선거 일주일 전인 2002년 12월 12일 20억원이 인출된 것을 포함해 그해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간 매달 수십억원씩 170억원이 사용됐다. 현대차 비자금도 2002년 6.13 지방선거를 전후해 보통 때보다 많이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 "사용처 정당성 확보하려는 진술 가능성"=검찰은 비자금을 노조 관리비로 사용했다는 주장에 대해 "사용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진술일 가능성이 크다"는 입장이다. "정치자금으로 전달했다"는 진술도 수사팀을 압박하는 수단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실제로 검찰은 정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에서 비자금 중 일부가 노조에 지급됐다는 임직원들의 진술을 적시하지 않았다. 다만 일부 금액이 불법 정치자금 등의 명목으로 임의로 사용됐다는 표현은 넣었다.

이와 관련, 검찰의 한 관계자는 "2004년 대검 중수부의 대선자금 수사 당시 한나라당에 100억원을 전달한 사실이 드러나자 당시 현대차 측은 80억원은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돈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며 "하지만 사실상 이 돈은 글로비스 등을 통해 조성된 비자금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말했다. 당시 진술로 인해 "비자금의 일부를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주장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됐고, 오히려 별도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처럼 오해를 살 수 있는 자충수를 둔 셈이 됐다.

김종문.문병주 기자 <jmoon@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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