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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는 제한전 노린 남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6·25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연구는 6·25의 엄청난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깊은「상흔의 고통」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지질 못해왔다.
그러나 최근 6·25를 체험하지 않은 소장학자들에 의한 6·25의 연구는 부쩍 활기를 띠면서 그 성격에 대해 활발한 토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6·25당시 인민군 정치보위부 고위장교였던 인물이 최근 6·25의 기원에 대해 주목할만한 증언을 해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증언자는 최태환씨 (59). 그는 50년 당시 21세의 나이로 인민군 중좌 (중령) 라는 고급장교로 인민군 주력부대인 6사단 (일명 방호산사단·해방전 중국 팔로군 소속의 한국인들로 구성된 인민군 정예부대) 의 정치보위부 책임 장교였다.
최씨는 역사 학술계간지인『역사비평』가을호에 실린 인터뷰기사에서『6·25는 남침임이 분명하지만 당초부터 전면전으로 계획되어 시작된 것이 아니다』는 증언을 했다.
최씨의 증언에 따르면 6·25의 기원은『해방직후 계속되던 평화적 통일협상이 무산되자 북한에서는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일종의 쿠데타」로 생각해 제한적인 전쟁을 일으켰으나 우연한 계기에 의해 전면전으로 확산되었다』는 것.
이러한 증언에 대해 최씨는 6·25직전인 50년 6월23일 있었던 당시 북한의 최고위급 인물의 하나인 김두봉(당시노동당 5인 정치국원의 일원) 의 발언을 그 증거로 제시했다.
당시 김두봉은 6사단에 내려와 중앙당 정치위원회의 결정사항을 보고하면서『지금까지 평화적 통일노력을 다했으나 실패했다. 부득이 해방전쟁을 개시할 수밖에 없다. 1주일동안에 서울을 해방시켜 남조선 국회와 합작해 조국통일을 결의하고 전세계에 이 사실을 알릴 것이다. 그러면 어느 외국도 이에 간섭, 침범할 수 없을 것이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는 것.
6·25의 시작을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는 최씨에 따르면 김두봉의 발언과 이후 전쟁의 진행과정을 볼 때 6·25는 처음부터 전면전으로 남쪽을 쓸어버리려고 계획된 것이 아니고 서울에서의 모종의 정치적 해결을 전제로 한 제한전 이었으나 유엔군 참전의 국제전으로 확산, 전면전이 되면서 엄청난 민족의 피를 쏟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씨는 북한의 6·25남침이 제한전으로 시작됐다는 부분에 대해 ▲50년 4월말까지 휴전선 부근에 특별한 변화가 없었고 ▲6월9일 첫 출동준비 명령을 받은 뒤 6사단이 휴전선 부근으로 이동배치 된 점 ▲서울 점령 후 서울 서부 최전방부대인 6사단이 김포에서 전투도 없이 1주일씩이나 대기하다가 입성한 점 ▲6사단이 보유한 작전 지도엔 37도선인 평택까지만 나와 있었던 점등의 체험을 증거로 제시했다.
최씨의 이러한 증언에 대해 학계에서는『구체적 사실들이 아직도 전체적으로 조망되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6·25 연구수준으로 볼 때 구체성 있는「사실」들이 밝혀진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편 최씨는 6사단을 따라 낙동강 전선까지 남하했다가 후퇴당시 낙오, 빨치산에 합류했으나 51년12월 포로가 돼 9년8개월의 감옥생활을 한 뒤 풀려나 현재 중개업자로 생활하고 있다. <강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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