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끌고 간다, 카라얀 스타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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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호 27면

 an die Musik: 베토벤 삼중협주곡

카라얀이 소련 3인방과 녹음한 베토벤의 삼중협주곡. EMI의 야심찬 기획음반이다.

카라얀이 소련 3인방과 녹음한 베토벤의 삼중협주곡. EMI의 야심찬 기획음반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에게 협주곡은 관현악곡보다 까다롭다. 관현악은 자신의 스타일대로 밀고 나가면 되지만 - 물론 빈 필처럼 말을 잘 듣지 않는 오케스트라도 있다 - 협주곡은 독주자와 조화를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실연에서 엇박자를 내지 않으려면 지휘자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독주자와 세부적인 곳까지 손발을 맞춰야 한다.

이런 과정은 대체로 어느 한쪽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다. 독주자의 뜻에 따르는 경우가 많고, 노련한 지휘자가 리드할 수도 있다. 문제는 개성 강한 두 사람이 만나는 경우다. 1962년 글렌 굴드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공연한 번스타인은 연주 시작 전 청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내가 원래 하고 싶었던 스타일의 연주가 아닙니다. 미스터 굴드의 뜻입니다.”

청중은 웃고 말았지만 두 음악가는 연습실에서 전쟁을 벌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템포에 대해 끝내 합의를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독주자가 세 명이나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969년 베를린 필의 카라얀이 소련 3인방인 오이스트라흐, 로스트로포비치, 리흐테르와 베토벤의 ‘삼중협주곡’을 녹음한 것은 EMI의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연주자들 이름만으로도 성공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꿈의 라인업’은 녹음 세션에서 충돌했다. 리흐테르는 ‘악몽’이었다고 회고했다(『리흐테르』, 브뤼노 몽생종). 카라얀과 로스트로포비치가 한 편이 되고 오이스트라흐와 자기가 다른 편이 되어 벌인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견을 보인 것도 ‘템포’였다. 리흐테르는 특히 2악장이 너무 느려서 음악의 자연스런 흐름을 막는다고 주장했다. 그 와중에 동료 로스트로포비치는 첼로를 드러내기 위해 카라얀 편에 붙었고, 짜증이 난 리흐테르는 태업하듯 피아노 음량을 줄였다. 그럼에도 카라얀은 일사천리로 녹음을 진행하고 끝냈다. 리흐테르가 한 번 더 녹음하자고 했지만 “이제 사진을 찍으러 가자”며 지휘봉을 놓았다. 이런 뒷사정을 아는 영국의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이 음반을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할 최악의 음반 20’중 하나로 꼽았다. 음악적 비소통의 표본이라는 것이다.

카라얀은 10년 뒤 삼중협주곡을 한 번 더 녹음했다. 조피 무터 등 자식 연배의 독주자들을 기용했다. 아마도 녹음 세션은 원만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음반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매끄럽긴 하지만 도무지 기백이라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영국인이 똥반이라 욕하든 말든, 카라얀과 소련 3인방의 옛 음반을 찾는다. 현재도 동곡 베스트셀러다. 단지 독주자들의 명성 덕분일까.

최근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둘러 앉아 삼중협주곡의 다른 명반을 감상했다. 지휘자 페렌츠 프리차이가 삐에르 푸르니에, 볼프강 슈나이더한, 게자 안다와 협연한 음반이었다. 실내악적 울림이 아름다웠다. 오케스트라도 하나의 악기가 되어 첼로, 바이올린, 피아노와 호흡을 주고받았다. 레브레히트가 말한 ‘음악적 소통’이 뛰어난 연주였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할 음반’을 턴테이블에 올렸다. 프리차이와 어떻게 다른가. 조용한 스타트, 부드러운 가속, 경쾌한 질주. 포르셰를 몰고 아우토반을 달리는 느낌이었다. 리흐테르가 너무 느리다고 했던 2악장에서는 첼로가 한숨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었다. 일부러 피아노 소리를 줄였다지만 EMI 기술진이 매만진 덕분인지 독주 악기들의 음량도 적당하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지휘자(Director)는 방향을 정하는 사람이다. 카라얀은 방향성이 두드러진 지휘자였다. 따라오지 않으면, 때론 끌고 갔다. 결과는 카라얀 스타일이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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