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비핵화 시한 끌며 최대한 많이 받아내려 할 수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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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호 27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폐쇄를 약속한 평북 철산군 동창리 서해위성발사장. [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폐쇄를 약속한 평북 철산군 동창리 서해위성발사장. [연합뉴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북한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전략적 변화를 결심했는지, 소중한 핵 프로그램을 놓고 타협을 해서라도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회담은 한 가지 답을 분명하게 줬다. 이번 회담은 협상 프로세스의 시작일 뿐 최종 목적지는 북·미 간 비핵화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란 점이다. 한 번의 정상회담만으로 단번에 ‘빅뱅(Big Bang)’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북한이 지금도 계속 영변 핵시설을 가동하고, 미신고 시설에서 우라늄을 농축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싱가포르 회담선 ‘빅뱅’ 합의 없어 #북, 비핵화보다 제재 완화 우선 #폼페이오 방북은 북 진정성 시험대 #트럼프 맞다면 비핵화 시간표 내고 #틀렸다면 더 많은 양보 요구할 것

또한 핵 프로그램을 끝내는 것이 북한이 추구하는 마지막 단계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 위원장은 북한이 제재에서 벗어나 경제 발전에 성공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반복적인 핵·미사일 실험은 더 강한 제재를 불러왔고, 핵 개발 비용은 북한의 경제발전을 더 심하게 압박했다. 핵·경제 병진 노선 추구는 팽팽한 줄을 걷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긴장감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제재 체제는 사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중국이나 한국이 북한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나설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회담 몇 시간 뒤 중국은 유엔 안보리 제재를 조정하자고 요청했다. 그런 뒤 러시아와 함께 실패했긴 하지만 제재 완화를 위한 안보리 언론성명 채택을 시도했다.

다른 측면에서 경제 발전과 핵 프로그램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앞으로 상당 부분 완화될 것이다. 일단 핵무기 또는 미사일을 추가로 생산하는 것은 개발하는 것보다는 저렴하다. 더욱이 북한은 우라늄 원심분리기와 플루토늄 재처리시설을 이미 확보했을 것이다. 이제는 계속 가동해 핵탄두를 만들어 저장만 하면 되는데 상대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

이 때문에 북한은 스스로 핵무기 포기를 결심해야 할 인센티브가 없다. 만약 포기를 결심한다면 이는 경제 번영을 통해 체제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은 모든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국제사회를 설득해 제재를 없애고, 무역을 하고,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북한의 전략적 변화 결심 여부에 대해 많은 전문가의 질문은 북한이 핵 포기를 할 거냐, 아니면 협상이 깨져 다시 경제 고립상태로 돌아갈 거냐는 선택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다. 이런 선택 앞에서 북한이 핵 포기를 결심한다면 전략적 방향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은 그런 선택을 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할 것이고 방법도 여럿 있다. 먼저, 북한이 핵·미사일 공장의 일부를 숨기려고 한다는 언론의 보도는 그럼직하다. 미국이 과거 파악하고 있던 미신고 우라늄 농축 시설에 대해 언론 보도가 나오는 것은 그런 시도를 막기 위한 위해서일 것이다.

둘째,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이 깨지더라도 지원을 중단하지 않을 것 같은 나라에 경제 지원을 요청할 것이다. 여기에 중국은 확실히 포함되고 한국도 포함될 수 있다. 물론 북한이 끝내 비핵화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미국이 판단했을 때를 고려하면 한국과 어느 정도까지 경제 통합을 추구해야 할지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셋째, 북한은 협상 과정에서 받을 것은 최대한 많이, 빨리 받아내고 최종적인 비핵화 시점은 가능한 한 모호하게 할 수 있다. 싱가포르에서 북한은 그렇게 했다. 공동성명에는 구속력 있는 시간표도, ‘행동 대 행동’ 방식의 합의도 없었다. 나아가 북한은 한·미 연합군사훈련 유예를 확보했다. 또 남북이 북한의 철도 재건에 합의함에 따라 잘하면 조만간 상당액의 현금을 받을 수도 있다. 이런 와중에 북한은 우호적인 여론 환경과 대화 분위기 조성을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했다. 다음 달 남북 이산가족 상봉, 한국전 미군 유해 송환, 반미 선전전 완화 등이다. 여기에 7월 27일 정전협정일 군사 퍼레이드 취소도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조치들 어느 하나도 핵·미사일 프로그램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북한은 미사일 엔진 실험장을 파괴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김 위원장은 북한 내에서 ‘언터처블’이라고 인식됐던 미국 대통령을 처음으로 만난 지도자이기 때문에 그 권위가 엄청 강화됐는데도 말이다. 아직 김 위원장이 이런 새로운 권위를 활용해 북한 내에서 논란이 될 조치를 단행했다는 신호는 없다.

정상회담 이후 3주가 지났지만 뭐 하나 딱 부러지게 결론이 난 게 없다. 그런 이유로 이번 주말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이 중요하다. 이번 방북은 과연 북한이 진심으로 싱가포르 약속을 이행할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말이 맞았다면 북한은 건설적으로 응할 것이다. 합의를 보거나, 더 가능성이 높은 것은 비핵화의 반대급부를 적은 매우 긴 리스트를 시간표와 함께 제시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틀렸다면 북한은 시간표에 발목 잡히지 않기 위해 시간을 끌 것이다. 구체적으로 미국 중간선거 전날까지 끌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이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하는 몇 안 되는 성공 중 하나인 상황에서 북한은 미국이 더 많이 양보하지 않으면 협상 프로세스 종료를 선언하겠다고 협박할 수 있는데 이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정치적 타격을 줄 수 있다. 북한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의 관계가 별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겠지만 때는 너무 늦을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과 협상할 때 ‘신뢰하라, 그러나 검증하라’는 모토를 내걸었다. 같은 모토가 북한과 협상할 때도 적용돼야 한다. 이 문구가 백악관 오벌오피스 벽에 큰 글씨로 쓰여 있기를 바란다. 그리 했을지 확실치 않지만.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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