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미코」의 북한방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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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소련 외교정책의 원로인 「그로미코」의 평양방문 목적이나 의제는 아직 밝혀진바 없다. 그러나 전반적인 정세의 흐름으로 볼때 그의 북한방문은 한반도 및 동아시아의 장래에 밝은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김일성 초청으로 다음달 중순 평양을 방문하게된 「그로미코」는 최근 잇달아 표명된 「고르바초프」의 동아시아정책에 관해 설명하고 북한의 호응을 설득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올림픽을 계기로 갑자기 표면화된 한 소 접근과 한국 동구의 관계개선에 놀랐을 김일성도 스스로 노선을 조정할 필요가 있고 소련과의 대화를 통해 그런 계기를 찾으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계에 「새로운 소련」의 이미지를 심기 위해 노력해온「고르바초프」는 최근 아시아에 눈을 돌러 「미소정책」을 펴 왔다. 그것은 그가 동부시베리아를 잇달아 방문, 개방적인 아시아 접근정책을 선언함으로써 더욱 적극화됐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 소련은 서울올림픽 참가를 전후하여 남북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노태우대통령의 「7·7특별선언」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다. 한국의 시베리아 개발 참여를 희망하면서 한국이 포함되는 동아시아 지역기구 구상까지 제시했다.
그러한 소련의 대한태도는 이번 서울올림픽 행사기간에 더욱 선명하게 묘사했다. 서울에서의 펜 대회나 학술회의에 참석한 소련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한국접촉, 한인계 연예인을 앞세운 볼쇼이 발레단 및 합창단과 모스크바 필의 파견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서울에 무역대표부와 외교대표부를 설치한 헝가리 등 동구 공산국가들의 한국 진출도 소련의 사전양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소련은 한국을 고립화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와 협력의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는 듯 분명하다. 이런 분위기는 올림픽을 전후한 한국의 대소 태도에서 더욱 익어졌다.
소련의 동아시아정책은 이 지역에서의 미국의 외교적 갈등을 계기로 타이밍을 맞추고 있다. 미국은 아시아의 신홍공업 국가들에 경제압력을 강화했고, 그 때문에 미국배척 기운이 이 지역에서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는 특히 한국에서 심했고, 그것은 이번 올림픽에서 미국의 NBC방송 등이 한국에 대해 고압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더욱 심각하게 부각됐다.
현재의 정세의 흐름으로 볼 때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이나 북한의 대외정책은 중대한 시련을 겪고 있다. 미국에 요구되는 것은 아시아인에 대한 보다 부드럽고 호혜적인 태도다. 북한에 요구되는 것은 보다 신축성 있고 개방적인 자세다.
이번 「그로미코」의 평양방문은 그런 미국과 북한의 대외자세에 변화를 촉구하는 무언의 신호가 될 것이다.
「그로미코」는 외상으로 있을 때 평양방문이 계획된바 있었다. 그러나 그가 최고회의 간부회의장으로 옮기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 「그로미코」의 평양방문은 한국의 적극적인 북방정책의 실효를 예측케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 그것은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이고, 역기능적이기보다는 순 기능적일 것으로 믿고 또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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