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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영국 근위기병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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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터키 이스탄불의 돌마바체 궁전 입구에선 매일 전통 군악 연주가 이뤄진다. 연주자 20여 명의 주위에 갑옷 차림으로 칼과 도끼를 든 호위병 10여 명이 늘어선다. 과거 오스만 튀르크 제국 시절 군주의 근위대였던 예니체리가 하던 행사를 바로 그 궁전 앞에서 재현하는 관광 상품이다. 서울 남대문과 덕수궁 앞에서 조선시대 군졸 차림으로 경비를 서거나 임무 교대식을 연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들은 차림만 병사일 뿐 실제로는 연기자나 다름없다.

이런 장면은 영국에도 있다. 런던 버킹엄궁 앞에서 평일 오전 11시에 열리는 근위기병대(Household Cavalry) 사열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볼거리다. 우아한 전통 군복에 깃털 달린 투구를 쓰고 가슴엔 번쩍이는 금속 흉갑을 착용한 기병들이 행진하는 모습은 장관이다. 이들은 궁전과 정부 청사 앞에서 경비도 선다.

영국인들은 이들을 '사납고 무서운 전사들'이라고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기마 의전과 기갑 수색의 두 가지 임무를 모두 맡는 정예부대의 현역 장병이기 때문이다. 기갑 수색부대는 장갑차나 경전차를 타고 적 후방 깊숙이 들어가 교란 작전을 펴거나 지뢰를 제거하며 아군의 진격로를 뚫는 것이 임무니까 넓은 의미에선 특공대다. 적 후방에 낙하산으로 침투해 특수작전을 펴기도 한다.

이 부대에 근무하다 대위로 제대한 영국 인기가수 제임스 블런트는 1990년대 말에는 분쟁지역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파병돼 기갑 수색 임무에 투입됐으며, 2002년 4월 여왕 모후의 장례식 때는 의전을 맡았다. 근위기병대는 이런 식으로 왕실 가족을 곁에서 보좌하는 영예와 최전방에서의 위험 임무를 교대로 맡는 게 전통이다. 부대 임무 배치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신분에 따른 의무)를 적용하는 셈이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손자이자 찰스 왕세자의 둘째 아들인 해리가 바로 이 근위기병대 산하의 '블루스 앤드 로열 연대'에 입대했다. 그런데 해리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근무를 강하게 원하며, 동료와 함께 위험지역에 파견될 수 없다면 차라리 복무를 포기하겠다며 고집을 피운다는 보도다. 영국인들은 21살 젊은 왕자(엄밀하게는 왕손)의 당당한 행동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지만 그의 안전을 우려한 왕실과 정부는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원 참, 우리도 그런 고민 좀 해 봤으면 좋겠다. 다음달 지방선거에 출마할 후보 가운데 자식 병역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이 좀 있다고 해서 하는 말이다.

채인택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