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을 되살리자 <5부> 지금 일본에선 ⑤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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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도쿄 오타구의 요네다금형에서 요네다 에이치 사장 부부(中)가 근로자들과 함께 기계를 다루고 있다. 허름해 보이는 공장이지만 이곳에선 IT 제품 생산 등에 필요한 초정밀 금형을 만든다. 요네다 사장은 TV에 출연해 아사히신문 편집위원과 대담을 할 정도로 주목받는 기업인이다.

어느 나라나 중소기업의 근로자 수가 대기업보다 많다.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1차 산업을 제외하고 종업원 300명 이하의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 전체 근로자의 88.3%에 달한다. 그래서 일본에선 중소기업을 ‘일자리 공장’이라고도 한다.

중소기업에서의 일자리는 곧 일본 ‘1억명 중산층’의 기반이다. 관건은 우량 중소기업이 얼마나 많이 나오느냐다. 건강한 중소기업이 많아야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관계는 기본전제다. 대기업만 잘 나가고 중소기업이 죽어난다면 양극화가 심해진다. 일본의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어떻게 ‘실리적 상생관계’로 풀어가고 있다.

도쿄(東京) 오타(大田)구 나미키금형의 나미키 마사오(竝木正夫) 회장은 얼마 전 거래처(대기업) 담당자에게서 이런 전화를 받았다.

"한두 번 거래해봤던 A사 사장이 '나미키금형이 만드는 금형을 훨씬 싸게 만들어 납품할 테니 나와 계약하자'고 제의하더라."

납품가를 후려치려는 은근한 압력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전화한 담당자는 A사의 제의를 면밀히 분석한 끝에 "이렇게 싼값으론 품질을 맞출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곤 A사와의 기존 거래도 끊어버렸다. '양심불량'으로 본 것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신뢰관계를 보여주는 한 사례다. 나미키 회장은 "일본 대기업은 중소기업의 상권(商權)을 가급적 보호해주려 한다"고 말했다. 산업구조로 본다면 많은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의 하청관계에 있다는 점은 우리나 일본이나 같다. 과거 일본 대기업들도 중소기업에 대해선 납품가를 후려치거나, 퇴직자를 낙하산 인사로 내려보내는 등 횡포가 적지 않았다. 이게 1970년대부터 바뀐다.

"일본 기업들이 한국.대만 기업에 추격당해 가격경쟁에서 품질경쟁으로 옮아가면서 하청 중소기업을 파트너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소기업들이 질 좋은 부품을 대줘야 경쟁에서 이긴다고 본 것이지요."(김주훈 KDI 선임연구위원)

중소기업들도 나름대로 살 궁리를 했다. 필사적으로 기술개발에 나선 것이다. 그것도 자기 혼자만 할 수 있는 기술을 찾아 갈고닦았다. 그 결과 작지만 특정한 기술에 고도로 특화한 중소기업들이 많이 나왔다.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개별 틈새시장에서 세계 1위를 달리는 일본 중소기업은 무려 1500개나 된다. 자본금 20억 엔 미만 또는 연간 매출 500억 엔 미만의 기업만 따져 그렇다는 얘기다.

예컨대 아오모리(靑森)현의 테프코 아오모리가 전형적인 사례다. 자본금 3200만 엔 규모의 이 회사는 자체 개발한 시계 문자판 전자 인쇄기술 하나로 관련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또 사장 부부를 합쳐 6명이 일하고 있는 도쿄의 요네다(米田)금형은 입체 레이저기술을 구사하며 세계 정상급 정밀금형을 만들고 있다.

중소기업들이 기술을 특화하다 보니 뜻하지 않은 현상도 벌어졌다. 특정 소기업이 대기업에서 하나의 부품을 수주받아 제작하기가 어렵게 됐다. 하나의 부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들이 여러곳으로 쪼개져 있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미(伊東博巳) 오타구산업진흥협회 기업지원그룹 디렉터는 "고도기술을 지닌 중소기업들이 늘어나자 대기업들은 일괄 하청보다 몇 개의 관련 중소기업을 그룹으로 묶어 발주하게 됐다"고 말한다. 즉 작은 톱니바퀴 하나 만드는 데도 절삭, 열처리, 표면가공 등의 공정을 전문적인 중소기업이 동시에 달라붙어 수주받는 경우가 늘어난 것이다.

이는 대기업에서 하청을 받아 다른 곳에 재하청 주는 것과는 다르다. 여러 중소기업이 그룹으로 한 건의 계약을 따내는 형태다. 일본 중소기업들은 이를 '하청(下請.시타우케)'과 구별해 '횡청(橫請.요코우케)'이라고 한다. 고도의 기술력이 있어야 가능한 구조다. 사야마 유키히로(佐山行宏) 에이쇼금속 대표는 "'요코우케' 네트워크가 대기업에 대한 중소기업의 교섭력을 높이는 배경이 됐다"고 말한다.

또 기술력에 자신이 붙은 중소기업들은 방어적 차원에서 대기업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 한다.

데자와 마사토(手澤雅人) 오타구산업진흥협회 관리그룹 코디네이터는 "30년 전까지는 안정적 수주를 위해 1사 전속주의가 많았지만 지금은 특정 대기업과의 거래를 전체의 30% 이내로 조절하는 곳이 더 많다"고 말한다. 요즘 잘나가는 도요타자동차에서 안정적 주문을 받고 있는 아이치(愛知)현의 중소기업들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물론 대기업과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임금을 '평균적으로'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종업원 100명 미만의 중소기업의 40~44세 근로자는 1000명 이상의 대기업에서 일하는 똑같은 나이의 근로자에 비해 월급이 25% 정도 적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평균치로 뭉뚱그려 본 것에 불과하다. 중소기업의 사정은 천차만별이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가 어렵다. 가와모토 히로야스(川本裕康) 게이단렌(經團連) 노동정책본부장은 "임금을 평균적으로 비교하는 건 무의미하다"며 "중소기업 중에는 대기업보다 더 좋은 대우를 해주는 곳도 있다"고 말한다. 중소기업 경영자인 나미키 회장도 "중소기업에 들어오면 처음엔 덜 받겠지만 정년이 없고 승진이 빨라 길게 보면 대기업에 처질 게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차이가 양극화로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술력의 유무에 따라 중소기업 내부의 양극화가 문제시된다.

주목해야 할 건 이런 현상이 정부의 도움이나 대기업의 지원, 또는 사회적 캠페인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타구의 이토 히로미 디렉터는 한마디로 '진화의 산물'이라고 표현한다. 국제경쟁에서 이기려는 대기업들의 전략, 하청구조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중소기업들의 생존경쟁이 서로 맞물려 나온 자연스러운 형태가 곧 '실리적 상생'이라는 뜻이다.

중소기업을 돕자며, 그래서 중산층의 기반을 탄탄히 하자며, 무슨 캠페인을 하거나 대기업을 닦달해 될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특별취재팀 = 김정수 경제연구소장, 오대영.남윤호.박소영 기자, 도쿄=김현기 특파원, 이승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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