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못한 일 스포츠가 해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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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서울올림픽은 나에게 새로운 감동을 안겨 주었다. 52년 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우승순간 못지 않게 나는 홍분에 들떠있다. 지금 내가할 수 있는 말은 그저 『행복하다』는 그 것 뿐이다.
베를린 올림픽 때는 오로지 내 개인의 실력으로 뛰어 이겼다. 그 승리는 바로 나 자신의 것 뿐 이었다.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달고 뛰었기에 그런 생각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맞은 서울올림픽은 의미가 전혀 다르다. 바로 우리 겨레의 능력으로 우리나라, 우리 땅에서 연 것이니 감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로 나의 기쁨도 컸지만 성화주자로 메인 스타디움을 달린 영광이야말로 일생에 한번뿐이다. 우리가 개최 국이 되지 못했다면 이런 영광이 어떻게 나에게 돌아올 수 있었겠는가.
메인 스타디움 10만 관중 앞에서 흥분한 나머지 손을 흔들고 춤을 추며 뛴 데 대해 「늙은이의 주책」이라고 핀잔할 지도 모른다. 올림픽가족들, 세계귀빈들, 그 보다 대 관중 들 앞에서 실례를 한데대해 이 기회를 빌어 사과하고 싶다. 그러나 내 심정을 이해 해줄 것으로 믿는다.
성화는 마지막으로 임춘애 선수에게 넘어갔다 아시안게임 3관 왕으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선수다. 우리의 간판스타로 내세울 남자마라톤선수가 없었던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남자가 안되면 앞으로 여자마라톤선수들이 분발해서 세계의 메달을 따주기를 기대한다.
올림픽 개막 전부터 많은 외국기자들이 찾아와 인터뷰하면서 『왜 지금 한국마라톤은 그렇게 약한가』라고 묻곤 한다. 선배의 입장에서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일본기자들의 질문초점은 주로 민족적인 것이다. 베를린올림픽 때의 일장기말소사건을 잘 알고있는 그들은「한국인 손기정」 의 자랑과 기쁨을 전하려 애쓴다.
어느 일본작가는 일장기말소사건을 비롯, 지난날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일본의 탄압 등 우리의 어두운 시절을 재조명하는 내용의 글을 모아 두 차례나 책을 퍼내기도 했다.
지난 세대의 그릇된 역사적 사실을 반성하고 새 세대에 선 동반자로서 새로운 선린관계를 이루어 나가야한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견해인 것 같다.
나 자신도 이제 와서 지난날의 감정을 내세우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그만큼 자랐고 스포츠수준에서 일본을 이미 앞질렸지 않은가. 이번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일본매스컴들이 흥분하여 한국의 경제발전·생활변화 등을 대서특필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 뿌듯함을 느낀다.
서독에서 온 한 기자는 또 이런 얘기를 한다. 『같은 분단국으로, 국제정치의 대립에 희생된 민족으로서 그 용기와 집념에 갈채를 보낸다』고. 사실 우리는 그들의 「라인강기적」부럽지 않은 「한강기적」을 창조했으니 이제 비로소 세계인들 앞에 큰소리를 칠만하다.
나는 「베를린의 귀빈」으로 자주 그곳에 초대받은바 있다. 물론 뮌헨올림픽에도 참석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그때의 장면은 정치와 이념의 벽을 넘어 동포의 정을 나누는 동·서독선수들의 모습이다. 당시동독은 아무 조건 없이 선수단을 보냈고 뮌헨시민들은 조그만 증오심도 없이 한번의 야유도 없이 그들을 환영하고 격려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북한은 공동개최를 고집하다 끝내 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참가의 뜻이 없었던 것을, 서울에 오지 않을 것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정말 불행한 일이다.
미국과 소련, 동독과 서독이 다시 손을 잡고 인류화합을 노래하는 마당에 어째서 북녘의 동포들은 이 자랑스런 민족의 잔치를 외면하는가.
실향민의 한사람으로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다. 이 아픔이 어찌 나뿐이겠는가.
소련이나 동독 기자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가 『이제는 서로 마음을 열고 손을 잡을 때』라는 것이다. 그들과 국교가 없는 우리로서는 이번 올림픽이 외교적으로도 좋은 계기가 됐다고 본다. 이번 서울올림픽 개막식에는 세계열강의 정치인들도 다수 참석했던 것으로 알고있다.「레이건」 미국대통령도,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서기장도 이번 올림픽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고 평화올림픽에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과연 그 정치인들이 이제까지 해결하고 성취해 놓은 것이 무엇인지 묻고싶다.
바로 그들이 못한 일, 그들이 그르쳐놓은 인류의 갈등과 반목과 투쟁, 그것을 올림픽이 훌륭하게 풀어주지 않았는가. 정치인들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스포츠의 위대한 힘, 바로 인간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놓으며 순수하고 숭고한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스포츠팬들의 그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
자, 이제 그 숭고한 제전, 뜨거운 열전이 시작됐다. 우리국민들도 발전한 새 모습, 단결된 힘을 보여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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