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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기자의뒤적뒤적] 가끔은 창밖을 보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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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워커홀릭 1, 2
소피 킨셀라 지음
노은정 옮김
황금부엉이

한창 TV 야구중계에 빠져 있는데 아내가 한마디 하더군요. 여성들의 86%가 요즘 우울증을 앓는다나요? 그러면서 만사가 귀찮고, 거울 속에 자기 얼굴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고, 뭔가 저지르고 싶고, 주위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짜증이 나고 등등 줄줄이 증세를 읊더군요. 사설이 길어지다 협박으로 변할 것 같기에 스윽 이 책을 내밀었습니다.

29살 난 사만타 스위팅. 영국 최고 법률회사의 잘나가는 변호사입니다. 열두 살 이후 자기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고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일을 하는 일 중독자죠. 승진을 코앞에 둔 그녀는 자기가 엄청난 실수를 한 것을 알게 됩니다. 감당이 안 된 그녀는 회사를 뛰쳐나와 기차를 타고 정처없이 떠납니다. 그리고 이름 모를 시골에서 얼떨결에 가정부로 취직합니다. 여기서 젊은 정원사를 만납니다. 지적이면서도 따뜻하고 여유 있는 이 청년과 그의 어머니가 사만타를 돕습니다. 그러면서 사랑이 싹틉니다.

자, 이 정도면 그림이 그려지나요? 밝고 재능 있는 주인공, 속물적인 집주인 부부, 출세에 눈먼 변호사 동료, 그와 정반대인 정원사와 그의 정다운 시골 친구들이 빚는 이야기는 어쩌면 상투적입니다.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디즈니 식 동화나 어릴 적 읽은 할리 퀸 시리즈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톡톡 튀는 문체에 담긴 천연덕스러운 유머, 간혹 번득이는 성찰이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합니다. 단추 하나 못 달고 샌드위치 한 번 만든 적 없는 사만타가 살림을 하며 벌이는 소동은 웃음을 자아냅니다. 계란을 삶는다고 전자레인지에 넣고, 세탁기를 쓸 줄 몰라 빨랫감을 온통 분홍색으로 만들어 버리고…. 샌드위치를 전문점에서 배달시키는가 하면 표백제를 잘못 써 자기 머리 색깔을 바꾸는 등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습니다.

정원사 나다니엘의 어머니는 이런 사만타에게 "모든 답을 다 알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닦달하지 마. 항상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어"라고 충고합니다. 사만타는 차츰 생활의 여유에 눈뜹니다. 그래서 회유하러 온 동료에게 "졸업장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번드르르한 사무실에서 일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인생을 낭비하는 거야?"라고 항변할 정도로 생각이 바뀝니다. 결국 "창밖도 쳐다볼 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라며 런던행 기차에서 내리죠. 자기가 원하는 삶을 택한 겁니다.

여권주의자들은 혹 '아편'같은 소설이라 비난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효과도 좋았습니다. 야구 중계를 끝까지 볼 수 있었으니까요.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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