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떳떳한 선물, 떳떳한 스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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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아빠, 5월 15일 스승의날에 학교가 쉰대요. 13일이 '놀토'(노는 토요일)니까 사흘이나 노네. 그런데 왜 학교에 오지 말라는 거죠?"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이들은 또 묻는다.

"미국에선 일주일 내내 선생님한테 선물 갖다 드렸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되나요?"

2년 전 미국으로 연수갔을 때 아이들이 거기서 초등학교에 다녔었다. 그 당시 기억이 난 모양이다.

미국 스승의날은 5월 첫째 주 또는 둘째 주(첫째 주 요일 수가 7일이 안 될 경우) 화요일이다. 스승의날이 들어 있는 주는'스승에 대한 감사 주간(Teacher Appreciation Week)'으로 정해놓고 있다.

학생들은 스승의날은 물론이고 일주일 동안 매일 다른 '선물(surprise)'을 가져간다. 교육청과 학부모-교사협의회(PTA)는 4월 말 가정통신문을 보내 학생들이 준비할 선물 내용을 미리 알려준다. 부모들은 자녀와 즐겁게 선물을 준비한다. 교사들은 고맙게 받는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기쁘기만 할 뿐 부담이 없다.

"▶월요일:담임선생님 감사 카드 ▶화요일:꽃 한 송이 ▶수요일:카드 한 장(선생님이 학생에게 답장 쓸 수 있도록) ▶목요일:사탕이나 사과 한 개 ▶금요일:미술 등 교과담당 선생님 감사 카드."

딸이 일기장에 적어놓은 당시 선물의 목록이다.

우리 현실을 생각하니 답답하다. 스승의날 풍습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우리처럼 '말 많은'곳이 있을까.

스승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을 전하려고 정한 날이 학부모와 교사들에게 스트레스만 안겨준다. 특히 올해는 서울지역 초.중.고 교장협의회가 한 달 전에 아예 '자율 휴업일'로 결정해 버렸다. 중.고생과 교원들에게 은사를 찾아볼 기회를 제공하려는 취지라고 한다. 하지만 사실은 '촌지' 때문이란다.

"5월만 되면 언론과 학부모 단체가 촌지 문제를 거론하는 바람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요. 차라리 교문을 닫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서울 A고 교장)

"지난해에는 교육청 암행반까지 떴어요. 야쿠르트 아줌마를 가장해 동태를 살피고,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고, 교사 소지품을 검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교총 관계자)

이 지경이 된 데는 교사.학부모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많은 교사가 참스승의 길을 가고 있다. 봉급을 떼어 제자 장학금에 쓰고, 소년소녀가장을 친자식처럼 돌보며, 장애인의 손발이 돼 주는 선생님도 있다. 하지만 40만 교원 중 '촌지를 밝히는' 이가 몇 명만 돼도 교사 모두가 비난받게 마련이다. 그게 교직이다.

학부모들도 '자식 둔 죄'로 벌써 고민을 한다. "그냥 넘어가자니 찜찜하고, 선물을 보내자니 부담 되고…." "상품권이 좋을까, 현금이 좋을까." 감사의 마음은 없고 눈치만 보며 답답해한다.

스승의날 학교 문을 닫는 것은 유감이다. 교사들이 떳떳하게 촌지를 거절할 수 있는 용기와 떳떳하게 정성을 받을 수 있는 자신감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조금만 발상을 전환해 보자. 값나가는 물건이나 돈봉투는 건네거나 받지 말자. 대신 카네이션 한 송이, 한 권의 책 등 마음의 선물을 주고받자. 당장 오늘 아침 따뜻한 마음이 담긴 e-메일을 선생님께 보내자.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

미국은 올해 스승의날(5월 9일) 주제를 "좋은 교사가 좋은 공립학교를 만든다"로 정했다고 한다. 공교육 위기란 비난여론이 일자 이를 극복하려 애쓰는 교사들의 노고를 격려하자는 뜻이란다.

우리도 교문을 활짝 열고 교사들에게 함박웃음을 안겨주는 5월이 되었으면 한다. '떳떳하게 주는 선물, 떳떳하게 받는 스승'. 올해 스승의날 표어로 어떨까.

양영유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