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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주도 성장론 홍장표 교체···文 '90% 긍정' 발언이 결정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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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경제수석을 전격 교체하면서 소득주도 성장 중심의 현 경제정책 방향이 바뀌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자리를 내놓은 홍장표 전 수석이 ‘소득주도 성장 전도사’로 불리면서 해당 정책의 입안과 시행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중앙일보와 인터뷰 하는 홍장표 청와대 경제수석.[중앙포토]

중앙일보와 인터뷰 하는 홍장표 청와대 경제수석.[중앙포토]

홍 전 수석은 문재인 정부 3대 경제 정책 중에서도 핵심인 소득주도 성장 정책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진보 성향 학자다. 홍 전 수석은 2012년 9월 ‘노무현 시민학교’에서 신자유주의 성장모델의 대안으로 소득주도 성장론의 뿌리인 ‘임금주도 성장’을 처음 언급했다.

당시 홍 전 수석은 “최저임금을 상향조정해 소득을 재분배하는 임금주도성장이 신자유주의 성장론의 대안으로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제시되고 있다”고 밝혔다. 실질임금이 증가하면 소비와 투자가 증가하고, 노동 생산성이 증가해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가능하다는 게 그의 이론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 해 연말 18대 대선에서 패배한 뒤 홍 전 수석이 제시한 소득주도 성장론을 접하고 자신의 성장담론으로 삼았다. 문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인 2014년 7월 ‘소득 주도 성장의 의미와 과제’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소득 주도 성장론을 화두로 제시했는데 당시 부경대 교수였던 홍 전 수석이 토론회에 발제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19대 대선에서 문 대통령이 승리한 이후 경제수석으로 발탁된 홍 전 수석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등과 함께 소득주도 성장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16.4%의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 등이 대표적인 소득주도 성장의 세부 정책들이다.

하지만 올해 1월부터 최저임금이 급격하게 인상된 이후 정책 추진 의도와 다른 결과물들이 속속 쏟아지면서 홍 전 수석은 궁지에 몰렸다. 1월에만 해도 30만명을 넘었던 취업자 수 증가 폭이 2월부터 3개월 연속 10만명 선으로 낮아지더니 급기야 5월에는 7만명대로 추락했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충격적인 결과”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소득주도 성장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되리라고 기대했던 저소득층의 소득 감소는 홍 전 수석에게 더 큰 충격이었다. 1분기에 1분위 저소득층의 소득이 역대 최대폭으로 감소하고, 5분위 고소득층의 소득은 역대 최대폭으로 증가했다. 이 때문에 대표적 분배 지표인 5분위 배율은 사상 최악 수준으로 나빠졌다.

특히 홍 전 수석은 이 결과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통계조작 논란에 휩싸이면서 궁지에 몰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분배 지표 악화 때문에 급히 마련한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가 90%”라는 현실과 동떨어진 발언을 했다. 청와대가 당시 발언의 근거 자료를 공개하지 않으면서 의혹은 더욱 증폭됐다.

이렇게 되자 6월 3일 홍 전 수석이 브리핑을 자처해 근거 자료를 공개했다. 통계청의 소득 원자료를 넘겨받은 한국노동연구원이 자영업자를 제외한 임금근로자만을 대상으로 새로운 통계 보고서를 만들었고, 이 보고서가 문 대통령 발언의 근거가 된 것으로 확인됐다. 여당과 학계 등에서 ‘통계 짜맞추기’라는 비판이 제기됐고, 특히 야당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과 홍 수석을 경질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홍 전 수석의 경질에는 소득주도 성장의 실패와 통계 조작 논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홍장표 청와대 경제수석이 지난 3일 청와대에서 열린 소득분배 악화 원인 및 소득주도성장 관련 기자 간담회에서 개인기준 근로소득 증가율 표를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홍장표 청와대 경제수석이 지난 3일 청와대에서 열린 소득분배 악화 원인 및 소득주도성장 관련 기자 간담회에서 개인기준 근로소득 증가율 표를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다면 앞으로 청와대의 경제 정책 방향은 지금과 달라질까. 이미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소득주도 성장 정책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본지가 21일 보도한 경제 전문가 40명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설문에 응한 전문가들은 가장 시급히 손봐야 할 정책으로 소득주도 성장 정책을 첫 손에 꼽았다. 혁신성장 등 성장률 제고 정책이 2위였다. 다시 말해 소득주도 성장 정책은 속도조절에 나서고, 성장률을 높일 수 있는 정책은 강화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일부 변화의 조짐이 감지되기도 한다. 20일 열린 고위당정청회의에서 다음달 시행 예정인 주 52시간 근로제와 관련해 정부가 사실상 6개월 시행 유예 조치를 취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박범계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당정청은 고용ㆍ소득분배 등 국민 생활과 밀접한 지표가 악화한 것에 엄중한 우려와 책임감을 표명했다”고 조치의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정책 변화를 예단하긴 어렵다. 정부와 여당은 고위당정청회의에서 소득주도 성장 정책의 큰 방향은 그대로 유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홍 전 수석은 자리를 내놓았지만 야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책기획위원회 산하 소득주도성장 특별위원장으로 선임됐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더욱 구체화하고, 중장기적 밑그림을 탄탄하게 그리라는 특명”이라고 밝혔다.

소득주도 성장의 최고 책임자라 할 수 있는 장하성 정책실장이 건재하다는 점도 정책 변화의 폭이 크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에 힘을 싣고 있다. 경제정책을 일부 수정한다 해도 미세조정에 그칠 것이라는 의미다. 본지 설문조사에서도 전문가 40명 중 34명이 기존 정책을 더욱 강화하거나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경제수석 교체로 쇄신하는 모습은 보였지만 사실상 정책 키를 좌우해온 장 실장이 유임돼 큰 틀의 경제 정책 기조가 변할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며 “또 혁신 성장에 힘을 싣기 위한 인사였다면 새 경제수석도 관료 출신이 아니라 산업부나 민간 출신 인사를 데려왔어야 했다”고 평가했다.
세종=박진석·장원석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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