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화해의 상징된 '대장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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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大長征.1934~36)은 중국 혁명 1세대의 상징이다. 장정 참가 하나만으로도 혁명성과 당성을 인정받았다. 그만큼 극한투쟁이었다.

홍군은 배고픔과 추위, 신발도 못 챙겨 신는 환경 속에서 국민당 군대와 싸워 가며 2년간 약 1만㎞를 행군했다. 이들은 사막.초원.설산을 가리지 않았다. 장정 기간 홍군은 토굴에서 잠을 잤고, 같이 줄을 지어 대소변을 봤다. 지위를 가리지 않고 모두 똑같은 고통과 기쁨을 나눴다. 피보다 진한 동지애가 생겨났다. 장정을 마친 뒤 이들에겐 남보다 우월한 지위가 주어졌다.

그러나 정치는 잔인했다. 59년 제일 먼저 펑더화이(彭德懷)가 제거됐다.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으로 한국전에도 참전했는 그는 대약진 운동을 공개 비판한 것이 화근이 됐다. 대장정을 이끈 마오쩌둥(毛澤東)은 냉정했다. 고락을 함께한 동지였지만 자신의 정치이념을 비판하는 행위는 용서하지 않았다.

그 뒤 문화혁명(66~76)의 광풍이 혁명 1세대를 강타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칼바람을 맞았다. 예외가 있다면 마오의 변함없는 충신 저우언라이(周恩來)뿐이었을 것이다.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이는 마오의 후계자로까지 부상했던 류샤오치(劉少奇)였다. 그는 감옥에서 홀로 죽음을 맞았다. 대장군 허룽(賀龍)의 최후도 참담했다.

혁명 1세대의 고통은 고스란히 다음 세대로 전해졌다. 이들은 감시와 핍박 속에서 숨도 못 쉬는 세월을 강요받았다. 류샤오치의 딸 류아이친(劉愛琴)은 그 아픔을 "아버지가 세상을 등진 뒤부터 우리 식구는 피눈물을 먹고 살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들의 다음 세대들이 다시 대장정으로 뭉쳤다. 류아이친은 물론 마오의 딸 리나(李納), 저우언라이의 조카딸 저우빙더(周秉德) 등 대장정 세대의 자녀 16명이 20일 만나 아버지, 또는 삼촌이 걸었던 그 길을 함께 걷자며 손을 잡았다. <본지 24일자 2면>

'제2의 대장정'은 한마디로 통 큰 화해였다. 깊디깊은 원한에서 용서를 길어 올린 용기였다. 이 소식이 전해진 뒤 장시(江西).쓰촨(四川) 등에서 수백 명의 지원자가 동참을 선언했다고 한다. 대장정은 이제 혁명뿐 아니라 화해도 상징하는 말이 됐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런 장면을 기대하면 무리일까.

진세근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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