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식당 일일 알바갔더니 식당서 남자 어르신들 질문 공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21)

휴일이다. 모처럼 느긋이 게으름을 피우는데 식당을 하는 지인의 전화가 왔다. 오늘 단체 손님이 있다며 아르바이트를 못 구해 나에게 좀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흔쾌히 수락하고 달려나가니 10시가 조금 넘는 시간인데도 12시 모임 예약 손님 몇 명이 벌써 와 있다.

이곳은 도시 근교지만 시골식당이라 동네 어르신들이 시간에 개의치 않고 들어와 밥 한 그릇 시켜놓고 두 시간 대화를 나누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인심이 넉넉하다.

지인의 부탁으로 식당 일일 알바

쉬는 날 지인의 부탁으로 식당에 아르바이트 하러 나갔다. 12시 예약 손님이 70세 어르신들이었다(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사진 freepik]

쉬는 날 지인의 부탁으로 식당에 아르바이트 하러 나갔다. 12시 예약 손님이 70세 어르신들이었다(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사진 freepik]

오늘 예약 손님은 70세 어르신들의 계 모임이란다. 뭐니 뭐니 해도 계모임은 치맛자락 휘날리며 수다를 떠는 여자들이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이번엔 70세 자축모임을 겸하는 거라 방 한구석에 수북이 쌓인 화장지를 보니 윷놀이도 할 모양인가보다.

11시도 되지 않아 열 분이 넘게 모였다. 우선 한 분 한 분 가족 안부를 묻고 안부 묻는 차례가 다 돌아갈 때쯤이면 모두 모여 정식 모임이 시작되는데, 밖에서 듣자니 정말 재밌다.

“당신은 손자 봤지? 가~가 몇째고? 얼라~ 기~댕기지?”
“울 영감은 어제도 이발소 간다고 나갔다. 아무래도 이발소에 이쁜 여자가 들어 왔나 벼.”
“바닷가 가서 회 먹었는데 후포항이 최고 들라. 갈 때 이야기하면 내가 알려줄게.”
“이 옷 우리 며느리가 사준 옷이다. 이쁘제?”

이런 대화인데 그것도 한 사람씩 하는 게 아니라 제각각 머리에 떠오르는 말을 잊으면 안 되니까 바로 하느라고 얼마나 왁자지껄한지. 나이 들어서도 만나면 즐겁고 반가운 건 친구뿐이다.

한 분 한 분 입장하면 “반갑다. 친구야~”를 외치며 얼싸안고 이산가족 만난 듯 반가워하고 또다시 재방송 레퍼토리가 한 바퀴 돌아가고…. 그렇게 정식으로 모임이 시작돼 식사하면서 소주를 잔에 따라 건배를 하며 “모두 모두 건강하고 다음 달에도 꼭 만나자~”고 외친다. 그날 윷놀이를 할 때는 어찌나 흥에 겨워 뛰는지 구들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내 젊은 시절엔 동네 나이든 여인들이 화려한 화장을 하고 나가면 주책없네, 분장했네 핀잔을 주었다. 아줌마들이 모여 시끄럽게 떠들면 나는 나이 들면 저렇게 무식하게 살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요즘은 내 목소리가 가장 크고 가장 시끄러우니 어르신들께 죄송하고 아주 부끄럽다. 나이 들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것을 나이가 들고서야 깨달았다.

남편보다 친구가 더 좋은 인생 후반부

때론 남편보다 친구가 더 좋은 때가 인생의 후반기라는 것도 이젠 안다. 오늘 이분들의 마음이 이팔청춘 소녀같이 보였다면 과장이겠지만, 함께 정담을 나누며 주고받는 눈길은 사춘기 소녀처럼 아름다웠다. 꼭 만나자는 약속처럼 사는 동안 그 모습으로 쭉~ 건강하게 살길 기원해본다.

옆방엔 80대 남자 어르신 계 모임도 있었다. 이 팀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인다. 처음엔 여덟 분이, 지난해까진 여섯 분이 오다가 요즘은 네분만 모인다고 했다. 모임을 한 지 10년도 더 됐단다.

80대 남자 어르신 계 모임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데, 한해에 한 분씩 돌아가시고 한 분은 거동이 어려워 더욱 애착을 가지고 모인다고 했다.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만 어쨌든 모인다(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중앙포토]

80대 남자 어르신 계 모임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데, 한해에 한 분씩 돌아가시고 한 분은 거동이 어려워 더욱 애착을 가지고 모인다고 했다.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만 어쨌든 모인다(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중앙포토]

한해에 한 분씩 돌아가시고 한 분은 거동을 못 하고, 그래서 더욱더 애착을 가지고 모인다고 한다. 집도 멀어 거의 한 시간씩 버스를 타고, 택시도 타고, 때론 걸어서 어쨌든 모인다.

여자 어르신들은 식당을 한두 군데 정해놓고 그곳에서만 모이지만, 남자 어르신들은 만나면 모두 뒷짐을 지고 식당들을 기웃기웃하다가 새로운 얼굴이 보이면 그냥 들어가곤 하는데, 오늘은 내가 그 새로운 인물로 낙점된 것이다. 하하하.

주인 언니의 말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니 한두 달에 한 번씩은 들리는 손님이라 단골이라며 반가워했다. 버선발은 아니라도 큰 몸짓으로 인사를 하고 대우하면 좋아들 한단다.

그런데 할머니 모임이랑 다른 점은 모여서 서로 간의 대화는 거의 없고 식사 상을 차리는 나에게 집중해서 질문했다. 집은? 나이는? 아이는? 등등 질문도 간단명료하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면 꼭 인근 다방에 커피를 주문한다. 어느 땐 찻집 아가씨가 두 번 바뀔 때도 있단다. 나이 들어서도 남자는 젊은 여성을 보면 제 마음이 젊어짐을 느끼는 것일까. 주인 언니는 할머니 손님 방은 방구들이 꺼질까 걱정이고, 할아버지 손님방은 문지방이 닳지 않을까 걱정이라며 농담했다.

언젠가 늘 하는 모임을 나가다가 어느 순간 맨날 먹는 밥 먹고, 영양가 없는 수다를 떨고, 노래방 가고, 귀가하는 이런 시간이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쓸데없는 시간을 축내는 것 같아 바쁘다며 모임을 외면하곤 한 적이 있다. 그것이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주제’란 것을 이제야 알았다.

좋은 사람을 만나 밥 먹을 때 함께 먹고, 노래할 때 함께 불러주고, 얼굴을 보며 대화한다는 것이 사람 사는 것인데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퍽퍽하게 살아온 힘든 세월 속에 늘 함께하던 한 사람이 사라지고 또 누군가가 아프다는 소식은 얼마나 슬프고 공허한 것인가.

살아보니 그렇게 모여서 웃고 떠들고 안부를 묻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오늘 나는 앞치마를 휘날리며 이방 저 방에서 즐거운 훈수로 활력소가 돼 주다가 돌아왔다. 나도 며칠 후면 서울로 모임 간다! 에헤야 디야~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