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하게 계획된 엉망진창 … 어! 진짜 '웃기는'연극이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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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매표소에서 티켓 대신 'STAFF'라고 적힌 패찰을 목에 걸어줄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1막 내내 배우 한 명은 어두운 객석에 턱 하니 자리를 차지한 채 연기를 했다. 중간 쉬는 시간 극장 로비에서 출연 배우가 와인 한 병을 살 때, 그게 복선이었음을 알아챈 건 2막이 시작하자마자였다. 늘씬한 여배우가 속옷 차림으로 줄곧 무대에 서 있고 똑같은 내용을 세 번 반복하는 연극, 바로 '노이즈 오프'(Noises off.사진)다. 말장난도 없고, 쿵쾅거리며 넘어지지도 않는데 눈물 흘릴 만큼 웃기고 안면근육 얼얼하게 만든다. 끝나고 나면 한번쯤 '웃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되묻게 하는 포복절도 코믹 연극이다.

# 연극도 사전제작?

'노이즈 오프'란 '쉿! 조용'이란 뜻. 영.미권에서 막 오르기 직전 무대 뒤편을 정리할 때 쓰는 말이란다. 영국 희곡작가 마이클 프라이언이 원작자다.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듯 이 연극은 무대 뒤 이야기다. 1막은 공연 전날 마지막 리허설 때의 풍경, 2막은 공연 첫날 무대 뒤 출연진과 스태프 간의 옥신각신을 다룬다. 3막은 공연 마지막날 형편없이 망가진 연극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극중극 자체가 흥미롭다. 영국의 근사한 2층 가옥, 주인이 없는 틈을 타 가정부가 푹신한 소파에서 늘어지려 하는데 부동산 직원이 애인을 데리고 몰래 잠입한다. 밀회를 즐기려는 이들 앞에 세금 빼돌리려고 해외로 나간 줄 알았던 주인 부부가 들이닥치면서 숨바꼭질은 시작된다.

무대엔 모두 8개의 문이 있다. 베란다 유리창까지 합쳐 9개 출입구로 배우들이 정신없이 드나든다. 출연진이 서로 맞부딪치지 않고 정확한 시간에 나가고 들어가는 게 연극의 재미다. 이 세트는 2월 중순 서강대 메리홀에 만들어 놓고 연습하다 이달 초 현재 공연 중인 동숭아트센터로 그대로 옮겨왔다. 공연 사나흘 전에야 뚝딱 세트를 짓는, 열악한 한국 연극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다. 영화나 TV 드라마처럼 사전 제작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배우 서현철씨는 "등.퇴장이 1막은 정교하고 3막은 엉망진창이다. 그 엉망진창을 정교하게 보여주는 게 더 어려웠다"고 토로한다.

# 웃음은 타이밍 싸움

제작비 3억5000만원. 제법 돈을 많이 들인 편이다. 극장 로비엔 종이컵 와인과 쿠키가 공짜, 고급 아이스크림은 1000원이다. 무대 위 배우들과의 합성 사진은 2000원이면 찍을 수 있다. 연극만 달랑 보지 말고 즐길 거 즐기라는 얘기.

극중극을 세 번 보여줘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건 매번 다른 변주이기 때문이다. 특히 3막은 처음 무대와 똑같지만 동선을 까먹고 대사를 건너뛰고 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애드립(즉흥 연기)을 하다 더 꼬이는 악순환이 연출된다. 공개된 상황을 반복해 다음 장면이 어떨지 예상하지만, 그 기대를 철저히 빗겨가는 데서 웃음이 터진다. 김종석 연출가는 "문제풀이처럼 공연이 진행되다 전혀 엉뚱한 해답이 제시되는 꼴이다. 절묘한 타이밍과 템포 감각에 기가 찰 정도"라고 말한다. 단 웃음의 매개체인 정어리가 국내 관객에겐 생뚱맞고 권위에 대한 조롱을 담은 원작을 한국화하지 못한 점은 옥에 티. 다음달 28일까지. 02-766-3390.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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