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원로들과 베이징서 결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현대차는 그동안 기업 위상에 비해 사회공헌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2월 중순에는 협력업체들에 1조3000억원 규모의 납품가 인하를 통보하기도 했다. 환율 급락에 따른 고육지책이라는 현대차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상생 경영'의 흐름을 거슬렀다는 비난이 터졌다. 삼성이나 SK와도 곧잘 비교가 됐다. 그 와중인 지난달 26일 압수수색과 함께 현대차 수사가 시작됐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정부의 '상생 코드'와 현대차의 경영 행태가 엇박자를 보였기 때문 아니겠느냐는 분석도 나왔다.

이때부터 현대차의 고민은 시작됐다. 정 회장은 17일 베이징 출장을 떠날 때만 해도 "사회공헌 방안은 계획된 것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대차 내부에서는 '사회공헌 카드'를 계속 손질해 나갔다. 다만 그 발표 방법과 시기를 놓고 저울질을 거듭한 것이다. '삼성 따라 하기 아니냐'는 지적이 우선 걱정됐다. '검찰 수사 무마용'이라는 역풍을 맞을지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그러나 정 회장의 베이징 출장 기간 중 벌어진 급박한 상황은 더 이상 결정을 미룰 수 없게 했다. 정 회장이 베이징에 도착한 다음 날인 18일 오전 그룹 2인자인 김동진 총괄 부회장이 검찰에 소환됐다. 그날 오후에는 정 사장 소환 통보 소식도 들렸다. 이날 밤 정 회장은 머무르고 있던 베이징 쿠론호텔에서 수행한 그룹 원로들과 머리를 맞댔다. 유홍종 BNG스틸 회장, 박정인 모비스 고문 등이다. 이들은 현대정공 시절부터 30년 이상 정 회장을 보필해 온 측근 중 측근이다. 이 자리에서 발표를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헌납 대상도 경영권 승계의 중심축인 글로비스 주식으로 결정했다. 후계 승계 구도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지만 사태의 진원지를 정리하는 게 정도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검찰 압수수색 25일 만에 내놓은 해법이었다. 19일 오전 호텔에서 만난 정 회장은 "대단히 피곤하다"고 말했다. 헌납 발표 3시간 뒤 인천공항에 내린 정 회장은 "죄송하다"는 말만 30여 차례 되풀이했다.

이날 글로비스 주가는 하한가로 떨어졌다. 전날 4만1750원에서 3만5500원으로 밀렸다. 정 회장 부자 지분의 시가는 이날 종가 기준으로 7987억5000만원이다. 하루 만에 1406억여원이 줄었다. 현대차 측은 "헌납한 주식 가치가 1조원에 미치지 못할 경우 다른 사재를 출연해 1조원을 맞추겠다"고 말했다. 증권사 관계자는 "글로비스는 총수 일가의 지분 헌납 결정으로 투자자들이 주식을 내던졌지만, 다른 계열사는 검찰 수사가 곧 마무리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올랐다"고 분석했다.

김동진 부회장 긴급체포

한편 현대차 비리 의혹을 수사 중인 대검 중수부는 19일 오후 현대차그룹 김동진 총괄부회장을 긴급 체포했다. 대검 채동욱 수사기획관은 "김동진 부회장에 대한 조사 분량이 많은 관계로 오후 11시쯤 긴급 체포해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부회장은 18일 오전 소환돼 현대차 비자금 조성 및 경영권 승계 비리 및 부채 탕감 로비 등에 연루된 혐의와 관련해 이날까지 이틀째 조사를 받았다.

김태진.이현상.김승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