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는 지금 ⑨ 중남미 통합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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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19세기 초 남미 북부지역의 독립영웅인 시몬 볼리바르의 대형 초상화 앞에서 연설을 하며 웃고 있다. 중남미 통합은 볼리바르의 꿈이었다. 차베스 대통령은 볼리바르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카라카스 AP=연합뉴스]

지난달 12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는 새 국기 헌정식이 요란하게 거행됐다.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새로 제정된 국기를 직접 게양했다. 이날부터 베네수엘라 국기에 그려진 별은 8개가 됐다. 전에는 7개였다. "여덟 번째 별은 '볼리바르의 별'을 상징한다"고 차베스는 선언했다.

시몬 볼리바르. 차베스가 입에 달고 사는 이름이다. 1999년 취임해 그가 가장 먼저 한 조치 중 하나가 국명을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으로 바꾼 것이다. 그가 열을 올리고 있는 '21세기 사회주의'운동의 다른 이름은 '볼리바르 혁명'이다. 친(親)정부 일간지'베아'의 편집인인 기예르모 가르시아는 "볼리바르를 알아야 베네수엘라의 오늘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의 독립 영웅이다. 19세기 초 대(對)스페인 독립전쟁을 주도해 베네수엘라뿐 아니라 콜롬비아.에콰도르.페루 등 남미 북부지역의 독립을 이끌어 냈다. 그의 꿈은 중남미 통합이었다. 하나의 연방으로 커가고 있는 미국에 대항해 중남미도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렇지 못하면 미국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차베스가 입만 열면 볼리바르 얘기를 하는 이유다.

차베스는 오일 달러를 무기로 중남미 '반미(反美) 좌파연대'결성에 힘을 쏟고 있다.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이나 페루 대선 1차 투표에서 1위를 기록한 오얀타 우말라 후보의 선거자금에 차베스의'촌지'가 포함돼 있다는 건 공개된 비밀이다. 베네수엘라와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잇는 8000km의 천연가스 수송관 건설 프로젝트도 차베스의 아이디어다. 지난해 말 차베스는 베네수엘라를 남미공동시장(MERCOSUR)의 다섯 번째 회원국으로 가입시켰다. 라틴아메리카의 정치.경제적 통합을 염두에 둔 포석들이다. 차베스만 통합을 외치는 건 아니다. 11일 브라질을 방문한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과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 간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 중 하나도 중남미 통합이었다. 브라질은 통합된 중남미의 맹주를 꿈꾸고 있다. 안데스 산맥과 태평양에 가로막힌 칠레로서도 경제적 통합은 절실한 과제다.

중남미는 과연 유럽연합(EU)과 같은 정치.경제적 통합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남미에서 만난 인사들은 대부분 고개를 저었다. 브라질 산업차관을 지낸 벤하민 식수 박사는 "라틴아메리카에는 자연과 문화라는 두 개의 장벽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아마존 열대림과 안데스 산맥이 자연의 장벽이라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뿌리는 문화의 장벽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럽식 통합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칠레.페루 등 태평양 연안국은 아시아 쪽으로 붙고, 안데스 산맥 동쪽 대륙은 미국과 유럽 쪽으로 붙어 독자적 진로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볼리바르의 이상은 아직은 요원한 꿈인 것 같다.

카라카스=배명복 논설위원 겸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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