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교육 실패가 부른 간호사 미국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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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역만리 독일로 일자리를 찾아가는 간호사들이었다. 그들은 말도 잘 안 통하는 곳에서 밤잠을 설치며 허리띠를 졸라매 모은 돈을 고국으로 보냈다. 눈물 젖은 마르크였다.

77년까지 독일로 간 간호사는 1만32명. 이들과 광원들이 보낸 돈은 당시 우리나라 수출액의 30%에 이를 정도였다. 그 돈과 그들의 파견을 전제로 들여온 차관으로 고속도로를 뚫고 공장을 지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일군 나라에서 흘린 땀과 눈물이 한강의 기적의 밑거름이 됐다.

40년이 지난 오늘, 독일행 간호사와 비슷한 규모인 1만 명의 간호사가 앞으로 5년 동안 미국 뉴욕주 36개 병원에 취업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 간호사들의 근면과 성실.실력이 미국에서도 인정받은 것이기에 얼쑤 하고 기뻐해야 할 것 같은데 그 소식이 마냥 즐겁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40세를 갓 넘긴 A씨는 최근 명문대 간호학과 교수 자리를 그만뒀다. 서울 강남의 한 어학원 미국 간호사 자격증시험(NCLEX-RN) 준비반에서 두 달째 씨름하고 있다. 학원과 과외의 노예가 되다시피 한 중.고등학생 아이들을 위해서다. 미국 간호사로 취업하면 영주권을 딸 수 있고 미국의 좋은 대학에 입학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30대 후반의 B씨. 그녀는 서울 대형 병원의 간호과장이다. 그녀 역시 미국 간호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그녀는 "미국 간호사 월급이 여기보다 많고 사교육비가 안 들 것이다. 애들만 조기유학을 보내지 않아도 되고 기러기 아빠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B씨 병원에서는 그녀만 그런 게 아니다. 상당수가 비슷한 동기에서 미국 간호사를 준비하고 있고 자격증을 딴 사람도 꽤 있다고 한다.

국내 간호사 면허증 소지자 중에서 수만 명은 전업주부이거나 다른 일을 한다. 흔히 말하는 '장롱 면허'다. 하지만 미국 간호사 취업 붐이 면허증을 장롱 밖으로 나오게 했다. 서울 강남역 인근 한 어학원의 NCLEX-RN 오전반 수강생의 3분의 1가량이 전업주부 간호사들이라고 한다.

지난해 NCLEX-RN 응시자는 1731명으로 매년 20~30% 이상 늘고 있다. 조건이 까다롭지 않은 뉴욕주로 몰리기 때문에 12개월 정도 걸려 시험을 보기도 한다. NCLEX-RN 공부를 하는 간호대생도 많다. 일부 남성이 직장을 그만두고 간호대학에 입학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점도 미국 간호사 열풍과 무관하지 않다.

국내의 숙련된 간호사들이 미국으로 대거 빠져나가면 국내 병원의 진료에 공백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미국으로 가려는 목적이 교육 이민만은 아니겠지만 주요한 동기임에는 틀림없다.

40년 전 독일에 간 간호사들이 그랬듯이 미국행을 택한 사람들도 현지에서 언어 스트레스, 문화적 차이, 외로움 등에 시달린다고 한다. 일부는 영어 때문에 현지 적응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외국행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희망 때문이다. 40년 전에는 "한국의 6~7배가 넘는 월급을 모아 집안을 일으키겠다"고 이를 악물었고 요즘에는 "내 자식만은 더 나은 환경에서 키우겠다"는 소망을 안고 떠난다.

3년 전 미국에 간 44세의 간호사가 최근 지인에게 전해온 말에는 서글픔이 진하게 배어 있다. "여기 일이 너무 힘들다. 그렇지만 애(15)가 무척 좋아한다.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당국자들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미국을 동경해서라거나 돈을 더 벌려는 현상이라고만 곡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대신 이것만은 알아 두자. 지금의 교육정책이 달라지지 않는 한 한국을 떠나는 간호사가 줄을 이을 것이라는 점을.

신성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