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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가 부른 전문가도 "출산·낙태는 국가가 강요할 수 없어"

중앙일보

입력

"현실적으로 낙태가 10~30여만 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처벌·수사를 않는 이유가 뭡니까?(이진성 헌법재판소장)"

"산부인과를 급습해 조사하기엔 이 범죄의 성격, 죄질을 봤을 때 그렇게까지 해야 되는 범죄는 아닌 걸로 이해하다 보니….(법무부 측 서영규 변호사)"

"수사 의지가 상당히 결여돼 있는 상황이면 낙태죄의 일반 예방적 효과는 없다고 인정하는 거 아닌가요. 이런 상황에서 낙태죄를 굳이 형벌로 처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이 재판소장)"

"그런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입법자가 낙태죄를 변화시킬 때 고려돼야 할 요소라고 생각합니다(서 변호사)" 

"낙태 허용 문제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하셨는데, 어떤 방법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나요?(이 재판소장)"

"저도 아쉽게 생각하는 대목입니다. 국회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서 변호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24일 낙태죄 위헌 여부를 두고 공개변론이 열렸다. [연합뉴스]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24일 낙태죄 위헌 여부를 두고 공개변론이 열렸다. [연합뉴스]

24일 오후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낙태죄 위헌 여부를 두고 공개변론이 열렸다. 법무부는 "낙태죄 처벌은 부당하다"는 주장에 강력히 맞서지 못하고 일부 인정하면서 공을 국회로 돌렸다.

법무부는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의견서를 내는 과정에서 일부 부적절한 표현과 비유가 사용돼 부득이하게 낙태에 이르게 되는 여성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은 신중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의견서 내용 중에는 낙태를 하려는 여성에 대해 "성교는 하되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 및 출산은 원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있었다.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조항에 대해 이미 2012년에 4:4로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위헌 정족수는 6명). 6년 만에 다시 낙태죄를 심판하게 된 것은 한 산부인과 의사가 낙태시술을 해준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2월 헌법소원을 청구하면서다.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이 26일 청와대 홈페이지,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를 통해 '친절한 청와대'라는 이름으로 23만 명이 청원한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해 답변을 하고 있다. [사진 유튜브 캡처]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이 26일 청와대 홈페이지,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를 통해 '친절한 청와대'라는 이름으로 23만 명이 청원한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해 답변을 하고 있다. [사진 유튜브 캡처]

첫 발언을 한 청구인 측 김광재 변호사는 지난해 2월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왔던 '낙태죄 폐지' 국민청원을 언급하면서 "짧은 시간에 23만 5000여명의 국민들이 청원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낙태 허용된다고 정치적·육체적으로 낙태를 쉽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태를 감행하는 건 그게 최선의 선택이며 낙태를 하지 않으면 태아와 임부가 더 불행해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청구인 측 차혜령 변호사는 "콘돔을 써도 13.9%가 피임에 실패하는 등 원치 않는 임신은 성적 방종 결과가 아니라 일상적 성관계로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이다"면서 "낙태 허용되면 낙태가 만연해질까 걱정하는데, 낙태 허용범위와 낙태율 사이에는 직접적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이 전세계 실태를 비교한 UN보고서 내용이다"고 말했다.

이날 공개변론 시작 직전에 헌법재판소 앞에서는 낙태죄 위헌결정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사진 문현경 기자

이날 공개변론 시작 직전에 헌법재판소 앞에서는 낙태죄 위헌결정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사진 문현경 기자

주심인 조용호 재판관은 청구인 측 변호사들에게 "어쨌든 자기가 원해서 한 성관계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닌가" "낙태가 합법화되면 여성이 낳고 싶은데 남성이 낙태를 강요할 수도 있지 않느냐" "낙태죄로 훼손되는 태아의 생명은 돌이킬 수 없다" 등을 질문했다.

청구인 측 최현정 변호사는 "여성의 낙태 결정은 무책임한 결정이 아니다. 임신경험이 없는 여성의 93%도 성관계시 항상 임신을 걱정한다"면서 "임신 지속을 결정한 여성의 절반 이상이 학업·꿈을 포기했다고 하는데 이런 여성의 인생에 대해서 돌이킬 수 없는 결과에 대해서는 누가 고민하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조 재판관은 이후 법무부 측 변호사들에게 "임신중절 여성 중 38%가 피임을 했는데도 실패한 경우라고 하는데, 피임 실패율이 상당한 상황에서 임신하면 그대로 출산하라고 하는 건 가혹하지 않는가" "임신경험자의 40%가 낙태를 경험했다고 하는데 이런 일반적인 경험인 낙태를 형사처벌하는게 합당한가" "낙태죄로 남성은 처벌 않고 여성만 처벌하는 게 성차별적 효과를 가져오지 않는가" 등을 물었다.

낙태법 유지를 바라는 시민연대 회원들이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유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낙태법 유지를 바라는 시민연대 회원들이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유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법무부 측 서규영 변호사는 피임 실패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낙태가 일반적인 현실에 대해선 "모자보건법에서 허용하는 낙태 사유에 대해 재검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행 모자보건법은 유전적 장애·전염성 질환·강간·인척간 임신 등 예외적인 경우만 낙태를 인정하고 있다.

법무부는 이날 참고인으로 정현미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불렀다. 정 교수는 "낙태는 여성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라면서 "주된 낙태 사유는 자녀 터울 조절·사회경제적 이유·미혼인 경우인데, 뒤집어 보자면 자녀출산과 양육에 대한 국가사회적 지원이 증대되고 미혼모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찍지 않는다면 더 많은 출산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출산이냐 낙태냐 문제는 개인과 가족의 구체적이고 치열한 갈등상황에 놓인 것이고, 제 3자나 국가가 강요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 교수의 말을 들은 조용호 재판관은 "법무부 쪽 참고인이라기 보다는 헌법소원 청구인 쪽 참고인 같은 진술을 하셔서 놀랐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제 의견과 소신"이라면서 "낙태에 대해 제가 연구한 내용들이 알려져 있는데도 이해관계인측 참고인으로 선정돼 저도 놀랐다"고 말했다.

청구인 쪽 참고인으로는 고경심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이사가 나왔다. 산부인과 의사로 일해온 고 이사는 병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 말했다. "낙태가 불법이기 때문에 병원에서 낙태를 시술할 때 남편이나 남자친구의 동의를 요구한다. 그들이 추후 형사고발을 할까 봐 그걸 방지하려는 요식행위다. 남성은 낙태로 처벌받거나 책임지지도 않으면서 낙태결정권을 행사하고, 심지어 맘에 안 들면 형사 고발도 한다. 엄연히 존재하는 성차별이다"는 것이 고 이사의 말이다.

고 이사는 또 "산부인과 전공의 수련과정이나 전문의 연수과정에 낙태시술에 대한 가이드라인이나 임상 매뉴얼이 없다. 낙태가 불법이라 낙태에 대해 공론화도 교육도 할 수 없다"면서 "의사의 의무가 생명을 보호하는 건데, 산부인과 학계에서는 안전한 낙태를 제공하는 것이 의사의 의무라고 선언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 이사는 또 현재 난임부부 시술로 많이 쓰이는 시험관 수정에서도 인공적인 유산이 이뤄진다는 점을 지적했다. "배아를 자궁에 착상할 때 다수의 배아를 착상해야 임신율이 올라가다 보니 3개 정도의 배아를 이식한 뒤 나중에 흡입을 해 선택유산을 한다. 이 배아도 수정이 돼 심장이 뛰고 있는데, 28만건의 배아 중 임신에 사용된 건 9만 9000건이고 18만개의 배아는 폐기된다. 이런 사업에 정부가 수백억원을 지원하면서 낙태는 처벌하는 건 상당히 시대착오적이다"는 것이다.

지난 20일 오후 서울 홍대입구역 인근에서 '임신 중단 합법화 집회'가 열렸다. 집회에는 경찰 추산 1000명의 여성이 참여했다. 성지원 기자

지난 20일 오후 서울 홍대입구역 인근에서 '임신 중단 합법화 집회'가 열렸다. 집회에는 경찰 추산 1000명의 여성이 참여했다. 성지원 기자

공개변론은 오후 2시에 시작해 3시간 넘게 이어졌다. 참고인 측 김수정 변호사는 마무리 발언에서 "법무부 의견서 내용과 오늘 진술 내용이 상당히 차이가 있는 것 같다"며 "법무부는 '자유로운 성행위' 운운하며 여성을 '성행위를 즐길 뿐 책임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출산이 강요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어떤가"며 질문을 던졌다.

김 변호사는 "여성들은 임산 사실만으로 해고되기도 하고, 미혼모나 미성년자 임신은 비난과 사회적 차별을 감내해야 한다. 불가피하게 낙태 선택한 여성은 불법시술하다 목숨을 잃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질병에 시달린다"면서 "같은 성관계 주체인 남성은 무엇을 감당하나. 여성 출산의 경우 남성이 양육은 동등하게 하는가. 미혼모의 4.7%만 양육비를 지급받고 남성은 낙태죄로 처벌받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고 말했다.

이진성 헌법재판소장. [연합뉴스]

이진성 헌법재판소장. [연합뉴스]

김 변호사의 마무리 변론을 들은 이진성 헌법재판소장은 "다른 건 대답 못 하겠는데, 여성 출산의 경우 남성이 동등하게 양육을 했느냐는 질문에는 마음이 상당히 찔리는군요"라고 말했다.

헌법재판소는 이날 논의한 낙태죄 위헌 여부에 대해 언제 결정할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 재판소장은 "선고기일은 저희가 따로 정해서 알려드리겠다"고 말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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