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수모 겪는 대회 깃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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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올림픽 잔치 분위기 조성을 위해 길가에 내걸린 깃발들이 찌들고 있다.
마지못해 체면치레로 게양한 곳이 있는가하면 먼지·공해에 때가 찌들대로 찌들어 새까맣게 변색된 것도 있어 자칫 잔치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수두룩하다.
28일 오후5시 서울 영등포 K극장앞. 5m크기의 대형간판 사이로 올림픽 대회기·휘장기·호돌이기 3개가 간신히 고개를 서울시내 간선도로변의 40여개 극장에 일제히 나눠주었는데 마당히 달만한 곳도 없어 적당히 달았다』는게 극장관계자의 말.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한복판 J세무서.
국기와 올림픽기를 게양하기 위해 2층 창가에 나타난 직원이 창문을 통해 3층 옥상에서부터 내려뜨려진 줄에 기를 매단다.
이어 10여m 줄을 당겨 게양되기 시작한 깃발은 건물 벽을 휩쓸며 올라가 먼지가 잔뜩 묻은채 펄럭였다.
한 울타리 안 또 다른 건물에서도 3층 게양대에 올림픽기 등을 달기 위해 1층서 끈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건물벽엔 새까만 줄자국이 그려져 있고 벽면에는 깃발이 먼지를 홈치고 지나간 얼룩이 희끗희끗하다.
건물 벽을 닦아주는 청소원 노릇을 하는 「깃발 수모현장」이다.
지난달 23일 밤11시. 경기도 파주 통일 노변 소공원에 게양됐던 오륜기와 참가국 국기 26개가 도난 당했다.
높이5m 게양대와 끊어진게 양줄만 썰렁하게 남았다.
이곳은 올림픽도로 사이클경기가 열리는 곳이라 붐 조성을 위해 군청측이 이날 아침 게양한 깃발시범도로였다.
올림픽 1백일을 앞두고 지난달 9일부터 거리와 빌딩에 일제히 오른 올림픽 대회기는 50여일이 지난 요즘 점점 늘어나는 깃발 수와는 반대로. 무관심 속에 없어지고 찌들고 외면 당하는 수모를 겪고 있는 것이다.
최근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국기 선양연구원」(원장 진무상·50)이 서울시내 1백개 주요기관의 게양 실태를 조사한 결과 절반이상이 낙제점인 것으로 나타났다.
잘못된 곳을 유형별로 보면 ▲게양대 간격이 좀아 태극기와 나란히 게양된 올림픽기가 서로 엉켜있는 경우 ▲게양대 자체가 건물과 10㎝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건물외벽에 질질 끌리는 경우 ▲깃봉이 부서져 있거나 없는 곳 ▲게양대가 비스듬히 기울거나 녹슬어 보기 흉한 곳 등 게양대자체에 문제가 있는 곳이 50여 곳이나 됐으며 심지어는 옥상의 게양대에 TV안테나·빨래 줄을 연결해 쓰거나 이발소 묘지 등을 묶는 기둥으로 쓴 곳까지 있었다.
또 ▲20층 건물에 어울리지 않게 3m높이밖에 안되는 형식적인 게양대 ▲가로수나 주변건물 간판 등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곳 ▲깃봉이 무궁화모양이 아닌 일본식 구형, 또는 팽이형인 경우 ▲태극기보다 더 큰 외국기를 달거나 소속 단체기를 국기나 올림픽기에 앞세운 경우 등도 각각 4∼5굿씩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에서만 관공서·각급 학교. 주요단체·기업체 등 이미 5천여 개소에서 올림픽 관련기가 게양됐으며 대회때까지는 줄잡아 5만개 이상의 깃발이 일반기업·상가 등에까지 내걸릴 예정이나 시민들의 무관심으로 제 뜻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건물의 얼굴이며 상징이어야 할 깃발이 형식적인 게양에 치우쳐 방치된다면 차라리 안다느니만 못하다』는게 많은 사람들의 지적이다.
산뜻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거리를 수놓아야할 깃발, 「깃발을 올리는 마음」이 모아져야 올림픽은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민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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