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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영화 같은 그녀의 바이올린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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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호 27면

WITH 樂: 요한나 마르치의 드보르작 바이올린 협주곡

요한나 마르치와 페렌츠 프리차이 협연의 드보르작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 LP시절의 레코드 재킷 디자인이다.

요한나 마르치와 페렌츠 프리차이 협연의 드보르작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 LP시절의 레코드 재킷 디자인이다.

예전에 살던 보증금 700만 원 전세방에는 TV가 없었다. 개인주택 한쪽 모서리 방이었다. 주인집 거실과 통하는 문은 막혀 있었고 작은 부엌이 하나 딸려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 집에 세 살던 열대여섯 살 공장 누이들이 살던 방도 이와 비슷했다. 평범한 부모 밑에서 자랐으니 집주인 아들에서 셋방 총각이 되는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자발적으로 TV를 버리고 살아본 2년은 내 인생의 특별한 기억이다. 요즘 같으면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없애야 유사한 경험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심심하면 어쩌지 하는 건 쓸데없는 걱정이다. 별다른 유혹 없이 책을 볼 수 있었고 밤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적적한 밤에는 친구들에게 손편지도 썼다. TV가 사라진 밤은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길었다.

요한나 마르치를 알게 된 것도 그 시절이다. 라디오에서 그녀의 이름을 듣고는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영화 ‘마루치 아라치’를 떠올렸다. 내 엉뚱한 상상과는 상관없이 라디오 진행자는 그녀를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소개했다. ‘전설도 모르는 나는 뭐람?’이라는 투의 빈정상한 마음과 ‘전설적인 아티스트’에 대해 호기심으로 라디오에 더 집중했다.

당시는 LP가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CD가 패권을 장악했던 때였다. 마르치의 LP음반 중에서 CD화된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음반시장의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상대적으로 그녀의 지명도가 낮았다. 물론 최근에는 분위기가 바뀌었다. 마르치의 음반은 CD는 물론이고 LP로도 재발매되고 있다. 그때마다 팬들의 지갑은 가벼워진다.

요한나 마르치의 녹음 중 명연으로 알려진 것이 드보르작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드보르작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제프 요하임에게 헌정되었다. 고전적 품위와 보헤미안의 자유분방함이 곁들여져 있어 드보르작 특유의 색채를 느낄 수 있다.

마르치는 1953년 6월 페렌츠 프리차이의 지휘로 베를린 RIAS 교향악단(현 베를린 도이치교향악단)과 정규 녹음을 한다. 흥미로운 건 정규녹음 며칠 전에 라디오방송국 자료용으로 같은 악단, 지휘자, 협연자가 같은 장소에서 녹음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도이치그라모폰(DG)의 ‘디 오리지널’(The original)시리즈로 나왔고 후자는 오디트(Audite)에서 출시했다.

불과 며칠 사이의 녹음인지라 해석에는 큰 차이가 없다. 연주시간도 1, 2악장은 거의 같다. 서정적인 느린 2악장은 화면에 비가 내리고 뭉게구름이 뜨는 영화 ‘카사블랑카’나 ‘애수’의 한 장면을 보고 있다는 착각을 들게 한다. 3악장의 경우는 라디오방송용 녹음의 품이 조금 넓은 느낌이다. 연주 시간도 조금 길다. 둘 다 모노 녹음이지만 음질에서는 온도 차이가 난다. 전자가 차분하고 안정된 느낌이라면 후자는 라이브 녹음처럼 카랑카랑하고 공격적인 분위기다.

정작 음반을 선택하는 입장에서 가장 큰 변별성은 함께 수록된 곡들의 차이다. DG는 또 다른 명 바이올리니스트 에리카 모리니의 브루흐와 글라주노프 바이올린 협주곡을 수록했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메시와 호나우두의 두 톱 시스템인 셈이다. 반면 오디트는 두 장의 음반을 온전히 요한나 마르치로만 채운다. 바흐, 헨델, 브람스의 소나타와 몇몇 소품들을 수록했다. 1분 남짓한 헨델과 비발디 바이올린 소나타 느린 악장에서는 교정의 목련꽃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요한나 마르치의 바이올린은 흑백영화 같다.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이나 비비안 리 같은 한 세대 전 은막스타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의 바이올린이 만들어내는 고고한 기품과 세련미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아련하다.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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