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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섭일특파원 취재기|「고려인」이 차려준 풋고추·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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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5월22일, 우리 일행이 소련을 떠나는 날이다. 아침식사 도중 인투리스트 안내원 「타냐」가 오후 2시에 호텔을 출발한다고 알려주었다. 우리 일행은 포도주를 한잔씩 나누어 마시면서 이별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뿔뿔이 헤어졌다. 기자는 오전 11시에 교포의 점심초대를 받아놓았다. 이것은 이번 취재의 마지막 프로그램이었다. 오전 8시30분 리무진 택시 편으로 먼저 피스카레프스코에 묘지에 가기로 했다.
전자 쇼 취재 때문에 개인행동한 날 가장 감동적인 구경거리가 이 묘지라고 우리 일행이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이 묘지는 레닌그라드시 동쪽, 택시로 1시간이나 걸리는 교외에 있다고 한다. 도중에 잠시 스몰니수녀원을 구경했다. 이 수녀원은 「캐서린」 여제의 특명으로 1764년에 착공, 1808년에 완공되었다. 귀족의 딸만을 특수교육 시킨 러시아 최초의 여학교였다. 네바강변 스몰니로에 있는 이 수녀원은 길이 2백m인 미색 2층 짜리 러시아 바로크 양식의 전형적인 건물이라고 한다.
아침 9시쯤인데도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에 몰려들고 있었다. 아마도 러시아혁명기간 노동자와 적군의 소비에트가 여기에 진을 쳤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는 미국관광객 뒤를 따라다니며 설명을 들었다. 안내원이 미국신문기자 「존·리드」가 바로 이곳에서 취재하며 「레닌」과 「트로츠키」 등 혁명지도자들과 사귀었다고 설명한다. 귀족출신 여학생들은 1917년 8월 소비에트가 들이닥치면서 쫓겨났고 곧이어 이곳은 소비에트 중앙위원회·볼셰비키당 본부·혁명군사평의회 등이 집결, 러시아혁명의 총본부가 되었다.

<항독 9백일의 상흔>
「레닌」은 러시아 귀족의 딸들이 졸업파티를 열었던 축제강당에서 노동자와 적군의 전면봉기를 총지휘했다. 그래서 1917년 10월24일부터 혁명이 승리한 26일 아침까지 이 수녀원은 세계적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이날 밤 9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은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던 것이다. 지금은 소련공산당 레닌그라드시당 청사인 이 수녀원 마당에는 오른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는 「레닌」 동상이 서있고, 정문의 그리스식 원주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최초의 소비에트,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뭉쳐라』는 혁명당시의 구호가 새겨져 있다. 시간이 없어 내부 구경은 단념했다. 그런데 심각한 표정으로 사회주의정권의 산실을 구경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있었다.
피스카레프스코에 묘지에 도착하자마자 안내인부터 먼저 찾았다. 대학생차림의 처녀에게 부탁했더니 불어를 아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레닌그라드대학교 3학년 「타티야나」였다. 그녀는 자기 할아버지가 여기에 묻혀 성묘 왔다고 했다. 이곳은 묘지라기보다 마치 공원 같았다. 입구 한가운데 「영원한 불꽃」이 타오르고 그 오른쪽에 있는 전시실이이 무덤의 내력을 알려주고 있었다. 레닌그라드는 1941년 9월4일부티 1944년 1월22일까지 9백일 동안 나치독일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시민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적군과 함께 끝까지 저항, 『영웅적으로 이 도시를 방어했다』는 설명이다.

<쌀밥에 숙주나물도>
독일군은 하루평균 2백45발의 대포알을 무차별 발사하는 한편 수많은 공습을 가했지만 레닌그라드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도시를 나치군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낸 댓가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다. 아사 45만여명, 전사 19만여명, 폭격과 포격에 의한 사망1만7천여명 등 모두 65만7천여명이 봉쇄 9백일동안 희생되었다.
이 무덤은 방위사령관 「파브로프」 장군이 거대한 웅덩이를 만들어 1942년 2월부터 봉쇄가 풀릴 때까지 47만여명의 시체를 묻은 공동묘지였다.
「타티야나」는 전시중인 소녀 「타냐」의 일기를 번역해 주었는데 「안네·프랑크」의 일기만큼 감동을 주는 처절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소녀는 엄마·아빠가 이웃 어른들과 같이 자원하여 전선에 나간 후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 친구들이 아사해 가는 항쟁의 나날을 기록했다.
이곳은 1960년 5월9일 승전 15주년을 기해 건축가 「바시리에프」의 설계로 레닌그라드 최대의 전쟁명물로 만들어졌다. 26ha에 걸쳐 펼쳐진 이 묘지는 북쪽 끝에 세워진 조국동상까지 폭 75m·길이 3백m의 산보로가 20개의 장미꽃 화단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이곳 사람들은 이 산보길을 조문의 산책길이라고 부르고 있다.
높이 6m인 조국동상은 인자한 어머니가 참나무 월계관을 두 손에 받쳐든 모습이었는데 조각가 「베라·이사이에바」의 걸작이라고 한다.
또한 처절한 반 나치항전에 참가해 살아남은 여류시인 「올가·베르홀츠」는 봉쇄기간의 탁월한 저항 지도자로 「전설의 올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녀가 쓴 비문의 한 구절은 소련인들과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여기, 적군병사들 곁에 레닌그라드의 어린이들, 남자와 여자들이 잠들어 있다. 그들이 목숨을 바친 댓가로, 혁명의 요람인 너, 레닌그라드는 지켜졌다. ……누구도 그들을 잊지 못하리.』
기자는 네바강 상류 이바노프스카야 14번지 고려인의 아파트에 3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30대 초반의 부부가 『어서 오십시으』라며 반갑게 맞아준다. 6층 아파트의 방에는 숙주나물무침·통닭구이·상치와 풋고추에다 된장(고추장이 없어) 등을 쌀밥과 함께 한 상 차려놓았다. 소련에서 처음 보는 한식이었다. 남편 「김아리크」가 소련에서 최고 술이라는 아르메니아산 브랜디를 권한다. 그는 먼저 조선인(북한인)이 아니며 고려인임을 강조하고 한국인을 처음 만나 너무 반갑다고 인사말을 했다.
한국말이 너무 서툴렀다. 그래서 「아리크」가 노어로 말하면 부인 「김루드밀라」가 영어로 통역했다.

<서울올림픽이 화제>
키예프대학을 같이 졸업한 후 결혼했다는 이들 부부는 모두 공산당원으로 노동연맹소속 학교 교수들이다. 「아리크」는 의학, 「루드밀라」는 생물학을 가르친다고 했다. 이들은 이민 3세로 조상이 양반이라고 말할 뿐 고향이 어디인지도 몰라 안타까왔다. 부모는 타슈켄트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형은 택시기사라고 한다.
소련 매스컴이 한국소식을 자주 전하고 있어 궁금한 것은 별로 없지만 한소간 교류가 없어 유감이라고 말했다. TV를 통해 서울올림픽 준비상황과 민주화과정을 열심히 보고 듣고있다는 이들의 소원은 통일된 조국을 보는 것.
그리하여 『조국사람들이 이곳에 오고 소련사람들이 서울에 가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고 묻기도 했다. 직장 때문에 서울올림픽에 갈 수 없지만 『소련도 참가하는 올림픽대회에 한 핏줄인 조선(북한)이 참가하지 않는 것은 민족의 불행이며 한국이 잘 설득해 조선인들이 참가하면 이곳의 고려인들 모두가 춤출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했다.
8평 정도의 방안에는 피아노·컬러TV·전축 등이 있어 상당히 높은 문화생활을 엿보게 한다. 또한 유리 진열장에는 러시아인형과 도자기 등 골동품들이 수집되어 있어 생활수준이 매우 높은 것 같았다. 이들의 월수는 「아리크」가 3백50루블, 「루드밀라」가 2백20루블, 합계 5백70루블(약 9백10달러)로 『우리는 중산계급』이라고 했다.
이것은 모스크바의 인투리스트 안내원 「세르게이」의 월수 2백10루블에 비해 크게 높은 소득이다. 「아리크」에 의하면 사회보장이 갈 되어 있는 데다 대학까지 학비가 안 들고 국가소유인 아파트 비용이 거의 안 들어 생활에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자가용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필요없다고 했다. 지하철과 무궤도 전차 및 전차 등의 교통망이 잘 짜여져 있어 전혀 불편이 없다는 것이다.
지하철과 전차겸용 회수권 한 권(20장)이 1루블로 교통비가 너무나 싼 편이다.
「아리크」와 주거니 받거니 한 아르메니아산 술에 얼큰히 취해버린 기자는 오후 1시가 넘어서야 일어섰다. 이들 부부는 부엌과 침실 등도 구경시켜 주었는데 80평방m짜리 아파트에 2가구가 산다고 했다. 그래서 단독주택을 갖는 것이 소망이라고 한다. 주택난이 심해 오랫동안 기다려야 차례가 돌아온다는 것이다.

<헤어질 땐 눈물 글썽>
이별의 악수를 청하자 이들은 『통일하여 모두 잘 살아야제!』라고 다짐하듯 되풀이했다. 손을 흔들며 차창을 통해 멀어져가는 「아리크」와 「루드밀라」를 보니 이들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이 모습은 진한 한 핏줄로 맺어진 민족애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새롭게 일깨워주었다.
레닌그라드시 남쪽 20km지점에 있는 프로코보 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30분쯤이었다.
인투리스트 안내원 「타냐」가 출국수속을 돌봐주어 세관·출국관리소를 쉽게 통과했다. 특히 이곳 세관은 외환 컨트롤이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세관원 아가씨는 기자의 신고서를 보지도 않고 아름다운 미소를 던지며 『유, 웰컴!』하고 통과시켜 주었다. 오후 4시50분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떠오르며 신록이 우거진 광막한 소련 땅은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기자에게 사증을 내준 소련당국과 취재를 도와준 많은 사람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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