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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현옥의 금융 산책] '긴축 발작' 고통 더 커지는 건 '달러의 덫' 때문

중앙일보

입력

아르헨티나가 국제통화기금(IMF)에 300억 달러의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사진은 지난 11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환전소 앞의 모습. [중앙포토]

아르헨티나가 국제통화기금(IMF)에 300억 달러의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사진은 지난 11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환전소 앞의 모습. [중앙포토]

 국제통화기금(IMF)에 단골 손님이 찾아왔다. 300억 달러의 자금 지원을 요청한 아르헨티나다.

무역 결제와 채무, 달러화로 표시돼 #달러 강세 속 자국 통화가치 하락에 #결제대금과 빚, 눈덩이처럼 불어나 #달러 지배력은 더욱 강해지고 있어 # #싼 값에 돈 빌리고 재정적자 지속 #기축통화국 미국, ‘과도한 특권’ 누려 #각국 중앙은행 보유외환 다변화 추진

 미국 등 주요국 중앙은행이 통화정상화로 방향을 틀면서 자금 유출이 본격화하며 페소화 가치가 급락하자 IMF에 ‘SOS(긴급구조요청)’를 친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세계 경제의 약한 고리다.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푸어스(S&P)가 선진국의 긴축 정책에 타격을 입을 국가로 꼽은 ‘5대 취약국’(아르헨티나ㆍ터키ㆍ파키스탄ㆍ이집트ㆍ카타르) 중 하나다.

 폭등하는 물가와 자본 유출에 따른 페소화 가치 하락으로 아르헨티나의 국가 부도 위험은 커지고 있다. 이달 초 외환보유액의 8%에 달하는 50억 달러를 쏟아부으며 페소화 가치 방어에 나섰지만 페소화값은 오히려 1.6%나 떨어졌다. 결국 기준금리를 연 40%로 인상하는 극약처방까지 썼다.

 더 큰 문제는 달러로 표시된 해외 채무와 무역 거래다. IMF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국가 채무의 66% 정도가 해외 통화로 발행된 빚이다.

 기타 고피너스 하버드대 교수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채무 중 달러로 표시된 빚은 정부 부채 980억 달러, 민간 부문의 부채가 680억 달러에 이른다.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에 육박한다.

 여기에 아르헨티나 무역 거래의 상당 부분은 미국 달러로 결제된다.

 고피너스 교수에 따르면 아르헨티나가 미국에서 수입하는 대금의 15%, 아르헨티나 전체 수입의 88%의 결제 통화가 미국 달러다.

 페소화 가치가 떨어질수록 갚아야 하는 빚과 결제 대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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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러 지옥’에 갇힌 나라는 아르헨티나만이 아니다. 고피너스 교수에 따르면 전 세계 무역 거래의 40%가량이 미국 달러로 결제된다. 미국이 전 세계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의 4배에 이른다.

 실제로 세계무역기구(WTO)에 따르면 2016년 전 세계 수출과 수입에서 미국은 각각 9.1%와 13.9%를 차지했다.

 달러로 표시된 채권 규모도 만만치 않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신흥국이 달러로 발행한 빚은 2조 달러 수준에 이른다.

긴축발작2

긴축발작2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자금 유출과 통화 가치 하락보다 신흥국을 더 괴롭히는 것은 ‘달러화된 세계’로 달러 강세에 따른 고통이 커지고 있다”며 “미국이 전 세계 생산과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전 세계 무역과 금융에서 달러의 지배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세계 경제가 ‘달러화’의 굴레를 지게 된 것은 기축통화로 달러화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영향력 때문이다.

 미국과 직접 교역을 하지 않더라도 주요 무역 거래나 자금 조달을 위한 국제 금융 거래에서 미국 달러화로 표시된 자산의 거래 비중이 크다. ‘달러의 덫’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때문에 달러 강세는 신흥국 경제의 고통과 불안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WSJ은 “미국이 대이란 경제 제재에 쉽게 나설 수 있는 것도 달러의 지배력을 믿기 때문”이라며 “미국의 은행 시스템에 대한 접근을 막는 것만으로도 경제를 위기로 몰아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기축 통화인 달러화의 지위 덕에 발행국인 미국은 ‘과도한 특권’을 누리게 됐다. 해당 발행국이 ‘백지 수표를 발행하는 권한’을 가졌다고 할 정도다.

 대표적인 것이 화폐 주조이익인 ‘세뇨리지’다. 통화를 찍어내면 교환 가치에서 발행비용을 뺀 만큼의 이익이 생기는 것이다.

 나라의 곳간이 거덜 나더라도 미국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윤전기를 동원해 돈을 찍어내는 발권력을 동원하면 된다. 아르헨티나 등 외환위기 등에 시달린 국가가 IMF 등에 손을 벌리며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지난해 8월 서울 명동 하나은행 본점에 쌓여 있는 달러화의 모습. [중앙포토]

지난해 8월 서울 명동 하나은행 본점에 쌓여 있는 달러화의 모습. [중앙포토]

 게다가 외환위기 등을 막기 위해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외환보유액과 달러화 자산을 쌓는 덕에 미국은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다. WSJ은 “달러화의 ‘과도한 특권’ 덕에 미국은 싼값에 돈을 빌리고 재정 적자도 이어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달러가 지배하는 세상에 반기를 드는 시도도 진행 중이다.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외환보유액 다변화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달러의 강력한 영향력 속에 달러 강세가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데다 세계 무역의 판도가 변화하는 데 따른 것이다.

 옌스노르드빅엑산테 데이터 수석애널리스트는 WSJ과의 인터뷰에서 “올해 주요국 중앙은행이 2000억~3000억 달러 규모의 외환보유액을 유로화와 위안화 등 다른 통화로 조정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IMF에 따르면 지난해 말 전 세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63%로 최근 4년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유로화(20%)와 일본 엔화(4.9%)의 비중은 상승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달러의 영향력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상당하다. 유로화와 위안화 등이 기축 통화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유로존과 중국 경제가 통화의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느냐에 대한 우려가 존재한다. 기축통화를 공급하는 과정에서 경상수지 적자가 늘어나는 ‘트리핀 딜레마’ 등을 감내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쟝 자크 바르베리스 아문디 유럽 자산 매니저는 WSJ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주요 주체로 머물러 있는 한 달러의 지배력을 바꾸려는 시도는 매우 느리게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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