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낭만주먹 낭만인생 21. 조부의 DNA<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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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만능 운동선수였던 필자의 아버지. 키 1m80cm에 유도·검도를 특히 잘했다.

개성상인들은 조선의 유대인이다. 조선 초기부터 개성 사람들이 과거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철저히 막혔고, 그 바람에 돈 버는 게 출세길이었다. 삼상(蔘商, 인삼장수)으로 유명한 김송도 역시 개성상인의 전형이다.

동료끼리의 술추렴은 물론 색주가 출입은 언감생심이다. 곰방대조차 들어 본 일이 없는 자린고비인 그는 떡 몇 개로 끼니를 때웠다. 방천왕둥이 할아버지는 한 술 더 떴다. 그는 '쉰떡 킬러'다. 조밥도 구경하기 어렵던 시절이니 남들이 버리는 쉰떡을 얻어 허기를 달랬다.

꾸역꾸역 삼킨 쉰떡으로 속은 메슥거리다 못해 뒤집어질 판이다. 그 때는 소금가마니에서 뜯어낸 짚을 씹어 속을 다독거렸다고 한다. 그런 모범생을 차인(借人.사환)으로 영입하려고 큰손들이 눈독을 들인 것도 당연하다. 결국 우마차업을 하는 황해도 부자에게 발탁됐다. 그렇게 9년, 황해도 부자는 임종 때 뜻밖의 유언을 남긴다.

"자식들아, 너희들은 아버지 덕에 호의호식하느라 세상물정조차 모른다. 내가 장만해둔 땅을 모두 넘기니 너네들은 그걸 먹고 살아라. 그리고 영식이, 너는 개미처럼 일만 했으니 집안의 모든 달구지는 네 차지다."

당시 개성에는 외지로 나가면 10년 이내에 돌아와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9년 만에 금의환향했다. 소달구지 수십 대를 이끌고서…. 그게 그의 20대 후반 나이. 그걸 밑천 삼아 할아버지는 운송업체 사장으로 변신했다. 요즘말로 사업 다각화에도 나섰다.

개풍군 일대에서 가장 큰 정미소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 편리화로 불리던 구두 공장도 차렸고, 밀집모 공장도 시작했다. 장돌뱅이가 당대에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둔 것이다. 당시 할아버지가 개성에 지었던 5층 건물은 시내 복판에 있던 김재현백화점 건물을 빼고는 제일 컸으니까.

유감이다. 근대산업을 일으켰던 할아버지의 장사 수완이 지금의 내게는 전혀 없다. 대신 뛰어난 운동신경과 완력이 우리 집안의 대물림일까? 와세다대 출신 아버지의 경우 무엇보다 만능 무도인(武道人)이었다. 키 180cm의 떡 벌어진 체격에 유도를 즐겼고, 특히 검도에 능했던 분이다.

내 막내 고모는 일제시대 이화여전 재학시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 유명했다. 당시 국내 신기록을 보유했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중국 루쉰대에서 조각과 교수를 하는 내 큰딸 방그레(32)도 그렇다. 20대 시절 그는 이종격투기를 한다고 설치고 다녔다. 그때 속으로 나는 "어휴, 집안 내력을 어찌 말려"싶었다. 핏줄이란 게 그런 것인 모양이다.

루쉰대를 다녀왔던 내 친구 여운(한양여대) 교수의 말에 따르면 방그레는 몇 해 전 술 실력으로 루쉰대 교수들을 제압했고, 교내 탁구대회 우승까지 했다고 한다. 작은 딸 방시레도 덩치로 치자면 언니를 찜쪄 먹는다. 하지만 내 DNA에 장사수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란지에서 17세에 떼돈을 거머쥐었으니….

배추 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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