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거룩한 밀레, 뜨거운 고흐, 따듯한 박수근이 나의 등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지난 4일 박수근미술관에서 만난 김진열 수상자(왼쪽)와 이건용 명예교수는 작품으로 잇는 사제의 정을 나눴다.

지난 4일 박수근미술관에서 만난 김진열 수상자(왼쪽)와 이건용 명예교수는 작품으로 잇는 사제의 정을 나눴다.

열 살 차이 스승과 제자는 손을 맞잡으며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을 나눴다. 지난 4일 오후 강원도 양구읍 박수근미술관 전시장에서 만난 이건용(76) 군산대 명예교수와 제2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작가인 김진열(66)씨는 작품 앞에 서서 50년 전 일을 회상했다.

제2회 박수근미술상 김진열 작가 #광성고 스승 이건용 교수의 영향 #한국인 신체 묘사 드로잉이 특기

당시 서울 마포 광성고 미술반의 지도교사였던 이 교수는 유난히 진지하고 열성적이던 김 군을 눈여겨봤는데 “얼마나 말랐던지 뼈에다 옷을 입혀놓은 것 같았다”고 했다. 김 작가는 “한국 행위예술의 선구자이자 신체드로잉을 개척하신 선생님을 뒤좇으려 무거운 재료를 들고 다니며 체력을 길렀는데 그 훈련이 지금 큰 도움이 된다”고 화답했다. 방산시장에 주문해서 쓰는 바탕 종이는 수십 겹을 풀칠해 만들어 돌처럼 무겁다. 여기에 연도에서 주워온 녹슨 철판을 붙이니 웬만한 장정이 들기도 버겁다. 노동하는 사람들, 기다리는 민초들의 목마름이 그 무게에 실려 있다.

김 작가는 “시뻘겋게 녹이 슨 금속의 질감은 노인의 얼굴이 되고, 때로는 흙으로 돌아가는 나무 둥치가 되는데 모든 생명과 사물이 자연으로 회귀할 때 일체가 되는 걸 표현했다”며 “그 든든한 무게감과 촌스러움의 투박한 존엄을 즐긴다”고 설명했다. 미술평론가인 윤범모 박수근미술상 운영위원장은 “사제지간의 영향이 ‘캔버스에 고착된 행위예술’로 나타났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 작가의 ‘귀로 오마주’.

김 작가의 ‘귀로 오마주’.

10월 14일까지 이어지는 박수근미술상 수상작가전은 오는 27일까지 열리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내 갤러리 문 전시와 나란히 김진열 작가가 품어온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김 작가는 이날 개막식에서 선배 화가 세 명의 회화세계를 등불 삼아왔다고 고백했다.

“밀레가 품은 노을의 거룩함, 고흐가 찾은 작렬하는 한낮의 열기, 박수근이 머금은 따뜻한 봄빛, 이들이 세상의 아픈 곳을 향해 그림으로 동행한 그 삶에 함께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제자의 인사말에 이건용 교수가 한마디 덧붙였다. “김진열의 그림은 구호를 외치거나 투쟁하는 예술과 달리 소외된 민중의 일상, 쉼 없이 노동하는 이들의 신체구조, 한국 사람만이 갖는 요소를 탄탄한 드로잉으로 묘사해 세계적인 작가가 될 가능성이 보입니다.”

박수근(1914~65) 화백의 장남인 박성남 심사위원은 “오늘 제가 밀양 박씨가 아니라 밀고 박씨가 됐다”고 말문을 열어 청중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밀레와 고흐의 이름 머리글자를 딴 밀고 박씨로서 다시금 선친의 회화관을 생각하게 된다”며 “나, 지금, 여기에 충실한 김진열 화가가 아버님을 기리는 상의 두 번째 수상자가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했다.

이날 김 작가의 이웃인 강원도 원주시 ‘절골 경로당’ 어르신 20여 명이 참가해 식장을 빛냈다. 작가의 거리 드로잉 연작인 ‘들숨과 날숨’은 도화지 8000장을 이은 설치미술인데 여기에 절골 주민 수십 명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전시장을 둘러보던 절골 사람들은 “저기 내 얼굴 있다”며 기념 촬영을 하면서 작가와 한동네 사는 기쁨을 누렸다.

박수근미술관은 최근 경사가 겹쳤다. 지난 3일, 박수근의 유화 ‘줄넘기하는 아이들’을 경매에서 낙찰 받아 유화 소장품 수를 10점으로 늘렸다. 원제가 ‘유동(遊童)’인 이 작품은 따스한 햇볕 아래 여자아이 세 명과 남자아이 네 명이 줄넘기를 하며 노는 그림으로 내년 3월 24일까지 열리는 아카이브 특별전 ‘앉아있던 사람들’에서 볼 수 있다.

양구군은 또 지난 2일 중앙시장 맞은편 노후 주택단지를 정리해 조성한 ‘박수근 광장’ 준공식을 열었다. 양구가 낳은 대화가 박수근의 동상이 들어선 이 광장은 앞으로 양구를 찾는 방문객에게 명소이자 랜드 마크 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양구=글·사진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