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전방위 먼지털이식 압박에 기업만 멍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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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난 정부에서 ‘금융개혁’은 금융 당국의 과도한 규제를 풀어 금융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금융의 삼성전자’를 키우자는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하지만 지금 정부에선 똑같은 ‘금융개혁’이란 간판을 달고도 내용과 강조점이 확 달라졌다. 금융을 산업이 아니라 재벌 개혁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다.

석연치 않은 삼성바이오로직스 사태 #정권 바뀌었다고 과거 판단 뒤집으면 #법치 흔들리고 경제 불확실성만 커져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2일 김기식 전 금감원장의 외유성 출장과 셀프 후원금이 말썽을 빚자 “관료 출신을 임명하는 것은 논란을 피하는 무난한 선택”이라며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분야는 과감한 외부발탁으로 충격을 줘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금융위원회가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의 자발적 매각을 요구하는 등 삼성의 지배구조 개선을 압박하고 나섰다. 공정거래위원회와 함께 금융위·금감원이 재계 압박의 첨병으로 나선 것이다. 금융권에선 금융을 콕 집어 개혁이 필요한 분야로 적시한 문 대통령의 언급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와중에 지난 4일 금융산업 진흥보다 감독을 중시하는 윤석헌 금감원장이 새로 임명됐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재벌들과 관료들은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것”이라고 논평했다. 윤 원장은 현 정부 들어 금융위원장 직속 금융행정혁신위원장을 맡아 금융개혁 로드맵 설계에 관여했다. 지난해 말 내놓은 금융혁신 권고안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차명계좌에 대한 과징금 부과 ▶금융·공공기관에 대한 노동이사제 도입 ▶은산 분리 완화에 대한 부정적 입장 등을 담았다.

개혁 성향의 원장이 자리 잡은 금감원과 ‘금융민주화’에 뒤늦게 뛰어든 금융위가 정상적인 기업 활동에 과도한 부담을 주지 않을까 걱정된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사태가 대표적이다. 금감원은 과거 판단을 뒤집고 삼성바이오로직스의 회계처리를 뒤늦게 문제 삼았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이 회계처리 덕분에 1조9000억원의 흑자를 낸 만큼 의혹이 있을 수 있다. 지난해 2월 당시 진웅섭 금감원장은 분식회계 정황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이를 뒤집은 것이다. 시시비비는 금융위 감리위원회와 증권선물위원회에서 가려지겠지만 금감원의 섣부른 발표로 이미 해당 기업의 시가총액은 8조원 넘게 사라졌다. 확정되지 않은 혐의를 공개하면 시장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금융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감원이 일방적으로 발표를 강행했다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물론 대기업이든 재벌 총수든 위법 행위는 법과 원칙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 경제 살리기라는 명목으로 눈감아 주는 시대는 지나갔다. 하지만 그 잣대는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동일해야 한다. 정권에 따라 법률 해석과 적용이 달라진다면 제대로 된 법치주의가 아닐뿐더러 경제의 불확실성만 키우게 된다. 과거 정부의 정책에 툭하면 적폐 청산의 칼날을 들이대는 정권과, 그 분위기를 읽고 눈치 빠르게 변신하는 관료의 밀어붙이기식 압박에 기업이 멍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