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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림 캉간현장|야전병원 방불한 의무실|병상2개에 사상자 80명 밀려들어|공습 노이로제…윤송늦어 한때 험악한 분위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캉간피격 이후 사망한 한국건설기능공의 시신과 중경상자귀국작전은 전쟁 상황하인 이란내의 각종 악조건 속에서 이루어진 길고도 지루한 긴장속의 7일간이었다.
지난달 30일 오전8시29분에 시작된 눈깜짝할 사이의 이라크공군기 공습은 캉간현장을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공습직후 병상 2개의 작은 현장의무실은 피범벅이 된 사망자와 중경상자 80여명이 뒤엉킨 최전방 군의무실이나 다름없었다.
간호원 오신일씨는 부상자들의 신음과 비명은 아예 귀에 들리지 않았고 사망자 구분과 중상자 응급처치에 눈코뜰새없이 바빠 당시의 상황을 일일이 기억할수 없을정도였다.
붕대도 모자랐고 지혈제나 기타 약품은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망자는 그나마 시신을 누일 장소를 찾지 못해 의무실밖 땅바닥에 버린듯 놓여졌다.
부상자들중 중상자는 이란혁명수비대의 차량이나 공사현장 픽업차로 3백50km 떨어진 부시르로 4시간이상 걸려 옮겨졌고 여기서 중환자는 수비대 헬리콥터로 좀 큰도시인 시라즈로 후송됐다.
부시르나 시라즈는 수도 테헤란에서 1천km나 떨어진 지방이라 이란의 대이라크 전쟁으로 병원마다 약품이 부족해 부상자 처리는 역부족이었다.
사건직후 캉간현장의 한국인 기능공들은 30km 떨어진 모하람 타헤리 대림건설현장으로 이동해야 했다.
사건 다음날인 1일부터 대림은 서울본사와 테헤란지점중심으로 중경상자 치료와시신및 부상자들의 본국 후송작업을 시작했다.
사망자들은 부시르의 원자력병원과 파테메자라 병원에 분산, 안치됐으나 이란의 시신방부처리를 않는 관례 때문에 시신보관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대림산업 테헤란지점은 대한항공 전세기의 이란 파견문제와 함께 이들 시신처리가 급선무였다.
따라서 테헤란의 외국인전담 방부처리전문가 2명을 바로 부시르로 초청하고 사망자 신원재확인에 들어갔다.
시신들 가운데 형체를 알아볼수 없어 처음에는 이란인 사망자와 시신이 바뀌는 소동도 일어났다.
구호반은 시신확인을 위해 사망자의 바지를 내려 국부를 확인함으로써 먼저 국적을 가려내야 했다. 이란인들은 전통적으로 국부의 음모를 깎아버리기 때문에 시신구분에는 꼭 필요한 조치였다.
대림측은 이들 희생자들의 본국 후송을 위해 가장 빠른방법의 일정을 마련했으나 사건 3일후인 지난3일 페르시아만에서 이란여객기가 격추된 사건이 발생, 이란국내 전항공기운항이 중단됨으로써 사정은 갑자기 악화되기시작했다.
이란정부는 KAL전세기의 테헤란 착륙에 신중함을 보여 당초 2일에 파견될 계획이었던 전세기의 테헤란도착도 결국 7일까지 연기돼야 했다.
더우기 캉간현장 기능공 2백80여명이 모하람 타헤리현장과 부시르 지점에서 별도의 사후대책위원회를 구성, 회사측에 사망자·부상자및 근무 근로자 전원의 동시 귀국을 주장해 대림측은 곤경에빠졌다.
근로자들은 대림측에 대피훈련 기피및 중경상자 응급처치 미비를 이유로 단체행동을 하는 한편 현장담당 직원들에 대한 폭행사건을 일으키고 전현장을 장악, 직원들에 대해 강압적인 행동제약을 가했다.
기능공들은 공습에 놀란 정신적 충격도 겹쳐 신경이 극히 날카로와겼으며 자그마한 이상한 소리에도 공습인줄 알고 땅에 엎드리거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누구도 부드러운 말을 잊고 있었다.
피해기능공들은 한결같이 하루라도 빨리 귀국해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특히 한 현장에서 같은 조로 일하던 동료 기능공의 사망을 눈앞에서 목격한 부상자나 다행히 변을 면했던 기능공들은 평소의 친구나 정든 동료들의 죽음에 연이어 흐느끼거나 통곡했다.
이들의 슬픔과 분노에 찬 심정은 3일 테헤란으로 옮겨진 부상자들이 지점에 설치한 분향소에서의 폭언과 대책본부장에 대한 비난및 성토로 이어졌다.
기능공들의 분노에 찬 행동과는 달리 테헤란지점의 대림직원들은 아무런 항거도 않고 후송작전에 돌입했다.
대림테헤란지점은 3일 국내선여객기 운항이 중단된 가운데 이란항공의 특별배려로 사망자와 중상자를 테헤란으로 옮기고 시신은 이란보건성 시체안치실에, 중상자들은 이란국영 석유공사법원에 입원시켰다.
이란보건성 시체안치실은 냉동실이 시체 2구 밖에 수용할 수 없어 겹치기로 시신을 한 냉동실에 넣는등 곤욕을 치렀다.
테헤란지점은 또 시신들의관을 구할수 없어 나무관을 한국식으로 특별히 주문제작하는 한편 병원에 입원중인 중상자와 테헤란에서 퇴원, 호텔에 든 환자들에게 한국식 식사를 따로 마련해 끼니마다 공급했다.
그러나 타헤리의 기능공 2백80여명은 KAL전세기의 도착 지연이 회사측의 의도적술수라고 비난, 시위를 벌였다.
주이란한국대사관과 공사발주처인 이란 국영석유공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엮어낸 KAL전세기의 7일 테헤란운항허가에 맞추어 모두 1만3천장 분량의 서류가 만들어졌다.
사망자 시신의 이란 국외반술에는 사망자 1명당 이란관공서 5곳의 허가에 필요한 5백여페이지의 서류가 준비됐고 이는 다시 12부씩 작성해야 했다.
이 와중에 사망자 가운데 이란서부 아와즈근무 기능공이 포함돼 밤새 1천여km를 택시로 왕복, 서류를 꾸미기도 했다.
특히 이란혁명수비대는 시신처리에 일일이 개입해 처리시간이 더 길어졌다.
그러나 7일 KAL전세기가 테헤란에 도착, 중상자와 시신들이 귀국하면서 테헤란의 대철수작전은 한숨을 놓게 됐다.
사건후 1차귀국 7일간은 대림대책본부 직원에게는 물론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기능공 모두에게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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