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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 '책 읽기' 역사 들춰 시대를 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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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읽는다는 것의 역사
(원제 A History of Reading:In theWest)
로제 샤르티에 외 엮음, 한국마케팅연구소
이종삼 옮김, 742쪽, 3만5000원

같은 책이라도 여러 가지로 읽힌다. 괴테의 '젊은 베르트르의 슬픔'을 소년 시절 나는 순애보로 탐독했다. 다분히 감상적 책읽기였다. 그러나 20대에 다시 읽었을 때 그 작품은 사랑을 통해 자아를 추구한 교양소설로서 다가왔다.

나만 그런가? 프랑스 학생들도 그랬다. 19세기 프랑스의 작가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을 사람들은 보통 한 청년과 연상의 여인 사이의 사랑 이야기로 읽는다.

그러나 1968년 직후 프랑스 학생들은 작품의 주인공을 혁명을 외면하고 파리 교외의 숲을 여인과 함께 산책하는 부르주아로 경멸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변화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1968년 프랑스를 뒤흔든 68 학생혁명의 여파다. 분명 책은 그것을 둘러싼 상황에 따라 갖가지로 읽혀진다. '책의 세계'와 따로 '책 읽기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얘기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1770년작 ‘책 읽는 여인’. 미 워싱턴국립미술관 소장품이다.

'읽는다는 것의 역사' 역시 책 읽기의 세계, 즉 독서와 독자의 세계를 주제로 다룬 사회문화사다. 근래에 책을 주제로 한 책들이 연이어 선보여 애서가들을 기쁘게 하고 있지만, 그 효시는 페브르와 장 마르탱의 '책의 출현'(1958)이 아닐까 싶다. 그 책은 인쇄본이 구텐베르크 이후 18세기말까지 유럽에 미친 문화.사회적 충격을 분석한다. 국내 책도 '근대의 책 읽기'(천정환 지음, 푸른역사, 2003년)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들은 주로 책 제작의 단계와 기술, 상품으로서의 책의 유통과정, 책의 모양새등을 문화사의 측면을 다룬다.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또 하나의 시대가 막을 올린다. 엘리트 사회가 대중사회 앞에 서서히 퇴출당했다.… 마침내 책 산업이 발전했다." '책의 출현'의 저자는 책의 사회문화사 출현을 예고한 것일까.

'읽는다는 것의 역사'의 키 콘셉트는 독서란 미리 쓰인 텍스트를 그대로 쫓아 읽는 행위가 아니며 텍스트는 오직 독자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예전 신학자 루터는 '오직 성서가 있을 뿐'이라는 원칙을 강조했지만, 그것도'쓰인 것, 오직 쓰인 것(성서)이 있을 뿐'이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성서에 근거를 지닌 신학적인 선택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제 8장 종교개혁과 독서)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자유롭다. 이 자유의 의미를 독서가 우리를 현실의 일상성으로부터 해방한다는 뜻에서뿐만 아니라 책이 펼쳐주는 세계를 편력하는 자유다. 니체는 책에 담긴 문자를 거꾸로 읽는 것이 가장 반듯한 독서법이라고 했다지만, 진정한 독서인이란 책의 어떠한 교본적 성격도 거부하는 자유인이다.

책과 책읽기의 방법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이 책이 또한 고전문학.고문서학.문헌학.역사학 등 유럽 출신 10인의 전공자들에 의해 쓰인, 훌륭한 유럽 지성사이기도 함을 간과할 수 없다.

이광주<인문 격월간 '안티쿠스' 편집인·'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 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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