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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 정치가 외면하는 정약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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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풍광이 뛰어난 경기도 양수리 유원지와 팔당댐 샛길에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했다. 오랜 장마로 길가 풀숲이 더욱 무성해졌다. 북한강과 남한강 물길이 맞닿는 이곳이 조용한 산책길로 알려진 것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덕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태어나 같은 장소에서 75년의 삶을 마감했다. 1백67년 전인 조선조 헌종2년(1836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조정은 파당.파쟁으로 날을 지샜다.

그를 기념해 이곳에 세운 다산기념관 주변에는 보름달이 뜨는 날 저녁 무렵부터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한다. 봄.여름.가을을 구별하지 않는다. 바로 옆 팔당호에 잠긴 월광이 너무 아름답다.

소슬 부는 강바람을 껴안고 모두들 기념관 언저리를 걷고 싶어한다. 그 입구에 죽 늘어서 있는 50여개의 나무 기둥을 무심코 지나노라면 다산의 가르침에 눈길이 간다.

하나의 나무 기둥마다 다산 어록이 적힌 동판이 펼쳐져 있다. "수령이 청렴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도적으로 지목한다." "산천은 변해 바뀔지라도 당파 짓는 나쁜 버릇 깨부술 날이 없구나" 등을 읽는다.

우리가 조선조에 살고 있는 것인지, 21세기 선진국 문턱에 서 있다는 현대에 몸을 담고 있는지 헷갈리기도 한다. 옛날 관료사회의 부패상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정치개혁과 국민경제의 실질적 향상 방안을 내놓은 다산의 주장은 오늘의 세태에 던지는 경구(警句)이기도 하다.

다산기념관 관리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치인들의 내방은 거의 없다. 기억에 남는 사람이 없단다. 그래도 5공화국 때에는 정치인이나 관료들을 상대로 다산 사상에 관한 강좌가 개설됐었다. 지금은 그런 행사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다산은 먼 나라의 사상가처럼 여겨진다.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다산을 찾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무엇보다 다산은 그들에게 두려운 존재일 것이다. 기념관 앞에 있는 그의 비문에 이런 글이 있다. "수령은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인가, 백성이 수령을 위해 있는 것인가."

국회 법사위는 최근 다산이 지은 '흠흠신서(欽欽新書)'의 서문을 적은 액자를 회의실에 내걸었다. 민주당과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정쟁의 회오리에 파묻혀 국민이 비웃든 말든 오불관언의 자세로 일관해온 것을 볼 때 좀 의외의 일이다.

상당수 정치인의 과거 행적을 헤쳐보면 다산의 사상을 운운할 처지도 아니며 다산의 비문이 던지는 질문에 답변할 자격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직자들에게 분별해서 법을 다루라는 '흠흠신서'의 뜻을 전달하려는 노력이 가상히 여겨진다.

다산이 18년 동안 유배지(전남 강진)에 억류돼 있을 때 완성된 이 책 이외에 '목민심서' 등의 큰 주제가 "백성을 구하려면 나라의 정치가 바로 잡혀야 한다"는 것이었음을 그들이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산 어록을 접할 때마다 정치인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어째서 옛날의 백성이나 오늘날의 국민은 시공을 건너 뛰어서도 똑같은 감정, 똑같은 울분을 토하게 되는 것일까. 서울 시청에서 자동차로 40~50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다산기념관은 정치인들에겐 너무 먼 거리다. 외면하는 만큼 더욱 멀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겐 낭만적인 장소가 아닌가.

세계적으로 방대한 5백여권의 저술을 남긴 다산이 높고 깊은 학식과 경륜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자신의 가난이었다. 그는 가난을 이렇게 읊었다.

"먹고 살 긴 대책은 전혀 없고/ 글 쓰는 방에는 짧은 등잔대 하나/ 남 모를 근심으로 밤잠은 아니오고/ 어찌하면 여생을 탈없이 마치리요." 오늘을 살아가기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다산은 많은 깨달음을 준다.

최철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