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국 경제 목줄조이기 작전|대림공장 피습계기로 본 페만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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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8년간에 걸친 이란·이라크의 페르시아만 전쟁은 해를 거듭합 수록 상대국 경제파괴전으로 치닫고 있다.
80년9월22일 이라크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초반에 이라크가 전쟁의 기선을 잡았으나 국력과 인구가 우세한 이란군의 반격으로 지구전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지상군에서 우세한 이란군의 82년 반격으로 이라크는 오히려 열세에 놓이게 됐다.
이란군의 지상군대공세는 87년초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돼 이라크는 82년초 점령지 코람샤를 빼앗긴데 이어 86년에는 바그다드-바스라를 잇는 국가경제의 생명선인 주교통로를 점령당하기도 했다.
이란군의 반격이 거세지고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후세인」이라크대통령이 이란에 대해 휴전을 제의했으나 「후세인」에 대해 원한이 있는 「호메이니」는 이를 거부했다.
따라서 이란의 대이라크 전략은 이라크를 전쟁상태로 계속 묶어둠으로써 국가경제를 핌박하게 하면「후세인」이 권력에서 저절로 몰락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라크는 이 같은 지상전에서의 세불리를 만회하기 위해 84년5월 이란의 정유소 및 원유수출기지인 하르크섬 공습을 시작으로 이란경제파괴로 전술을 발전시켰다.
이라크는 개전당시 이란공군력이 전투기 60여대 뿐이란 약점을 이용, 5백80기로 절대 우세한 제공권을 이용, 공습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이라크는 프랑스의 미라지 F-1 및 슈퍼 에탕드르 전투기를 도입, 테헤란·성도 콤시등을 비롯, 주요군사 및 민간지역을 공습했다.
이란도 반걱에 나서 바그다드에 대한 미사일공격으로 대응함으로써 페르시아만 전쟁은 민간인 살상자가 급증하는 최악의 전쟁으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이라크는 지난85년 이란원유수출항의 중추인 하르크섬에만 60차례에 걸쳐공습을 가했다.
그러나 이같은 공습에도불구하고 이란이 원유수출을 계속하고 대이라크 전쟁을 여전히 우세하게 이끌어 갔다.
이라크의 다음 전략은 86년2월부터 이란산 석유를 수송하는 모든 나라의 유조선 및 기타 화물선에 대한 공격으로 이란수출의 목줄을 조르는 것이었다.
이란도 이라크에서 출항하거나 쿠웨이트를 경유하는 모든 이라크 항구 출입항 선박에 대해 쾌속정공격이나 중공산 실크웜미사일 공격으로 맞섰다.
영국의 로이드해양정보서비스에 따르면 86년 한햇동안 페르시아만에서 이란·이라크의 공격을 받은 선박피해사건은 1백차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페르시아만의 재앙은 두나라의 전략상 차이로 2가지로 나누어 진다. 이라크는 이란경제를 궤멸시킴으로써 경제난을 이기지 못한 끝에 「호메이니」가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란은 이라크를 지원하는 사우디·쿠웨이트에 대한 선박공격으로 이라크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두 나라를 견제하고 이라크를 끝내 경제적 위기로 몰아 넣음으로써 「후세인」을 몰아 내겠다는 것이 목적이다.
이란은 86년10월에서 87년4월 사이 6개월동안 쿠웨이트 선적 선박에 대해 15차례에 걸쳐 공격했다. 쿠웨이트는 미국등 열강에 유조선상해보장등 지원을 호소했다.
미국의 쿠웨이트 보호가 시작되고 영·미·불·소4개국의 전함 75척을 파견, 페르시아만은 열강함대의 무력시위장이 됐다.
이란은 국제적 고립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소·중공을 비롯, 미국까지 포함한세계 26개국으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석유수입을 무기수입에 쏟아넣고 있다.
이란·이라크 전쟁 8년동안 두 나라의 인명피해는 모두 1백2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85년까지 5년간 전쟁 희생자는 50여만명이었으나 지난3년간 민간인 대량 살육전으로 확대되면서 희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셈이다.
이란은 지난 8년간 매년 50억∼90억달러의 군비를 투입, 모두 5백억달러 이상을 썼으며 이라크도이에 못지 않는 전쟁비용을 쓴 것으로 알러져 있다.
결국 세계무기상들만 배불린 두 나라의 혈투는 서로 상대국 경제파괴로 향해 치달으며 수시로 애꿎은 제3국인들의 희생을 함께 강요하고 있다. <진창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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