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건물이 살아서 꿈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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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사람 눈이 뚫어지게 바라보는 느낌." "한글의 기역 자 아닙니까." "괴기한 벌레가 기어가는 줄 알았어요." "나눗셈표가 많네요." "바람 불어 물결무늬 이룬 연못을 보았는데요." "확성기에서 음향이 터져나오듯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2일 오후 서울 강남 역삼동에 새로 문을 연 LIG 손해보험 건물. 드나드는 사람마다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한마디씩 털어놓는다. 보는 이마다 해석이 제각각이다. 1층과 2층 로비, 7층 대회의실 안팎에 걸린 그림은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당긴다. 둥근 원이 사각형의 틀을 깨고 밖으로 퍼져나가려는 듯 움직인다. 바람이 불고 소리가 들린다. 오감을 건드리는 환경미술이라 할 수 있다. 덩치 크고 삭막한 대형 건물을 그림 몇 점이 살아 꿈틀거리도록 움직인다. 힘센 미술이다.

화제의 벽 그림을 그린 이는 화가 이상남(53)씨.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며 동양의 정신을 서양 기법으로 풀어낸 작품 세계로 평가받고 있다. 이씨는 "동양 미학의 여백을 서양 미학의 공간에서 풀어냈다"고 설명했다. 깔끔한 줄과 풍성한 기호를 조합해 새로운 상상을 낳는 풍경을 만들었다.

작업실로 쓴 대형 비닐하우스에서 작가는 하루 8시간씩 그림 재료인 옻에 푹 빠져 지냈다. 위 큰 사진은 서울 역삼동 LIG 신축 건물 2층 로비 벽에 설치된 이상남씨의 옻칠그림.

이번 작업의 핵심은 옻이다. 동양 전통 공예에서 중요한 재료로 꼽히는 옻을 현대로 가져왔다. 옻은 '검다'는 표현을 넘어서는 검정 색을 띤다. 옻의 검정은 모든 색과 통하고 다른 색을 품어 안는다. 그 검정은 장려하면서도 무겁지 않고, 진하면서도 담백하다. 그 검정을 얻기 위해 화가는 하루 8시간씩 노동했다. 옻을 입히고 사포로 문지르고 다시 색을 입히고 깎아내는 반복으로 몇 달을 보냈다.

이씨는 옻 예찬론으로 자신의 작품을 설명했다. "옻은 신비로운 물질입니다. 이번에 작업하면서 옻에 푹 빠졌습니다. 일체의 장식을 버리고 사물을 극도로 압축하는데 옻만한 재료가 없어요. 법(法)처럼 정련한 형태를 제 속에 지닌 사물입니다. 물상의 뼈만 남는 물감이랄까."

작가는 "옻을 여러 번 올리니 평면이 저절로 입체가 되더라"고 했다. 대회의실을 장식한 12m 길이의 그림은 이 입체감으로 창문 밖 도시와 어울린다. 비죽비죽 하늘로 치솟은 대형 빌딩 숲과 빈틈없이 긴장한 흑백 그림이 이중주처럼 어우러졌다. 무미건조한 사무실에서 딱딱한 이야기가 오가다가 이 그림에 마음이 부딪치면 뭔가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것 같다. 작가가 작품 제목을 회전하는 타원체란 뜻의 'Spheroid'라 붙인 까닭이다.

이씨의 작품은 그동안 대형 건물에 들어가던 환경조형물의 상투성을 깬 점으로도 의의가 크다. 건물과 따로 노는 환경조형물, 덩그러니 크기와 점수로 가름하던 장식물의 상식을 벗어났다. 작가는 "건물주가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겠다는 의지가 뚜렷해서 일이 즐거웠다"고 말했다. 환경조형물이 건물주와 작가의 합작품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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