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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무대 오른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잊지 말아주세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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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오후 7시 전남 목포시에 있는 극단 새결의 공연장. 어두운 무대에 불이 들어오자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여성 3명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앞으로 열릴 반상회, 날씨, 새로운 이웃에 대한 호기심 등 일상적인 이야기다.
이때 검은 옷을 입은 한 여성이 무대에 올랐다. 약속이나 한 듯 그 앞에선 다들 입을 다문다.
"일찍 들어오네"라는 어색한 안부 인사에 "일을 그만뒀다"며 집 안으로 들어간 이 여성. 남은 사람들은 그에게 한 마디씩 뒷말했다.
"저 집 세월호라며. 다들 몇억씩 받았다던데 10억인가 20억인가. 그러니 일 관둬도 상관없지"

4·16가족극단 노란리본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공연 #단원고 희생·생존학생 엄마 8명 무대에 올라 #유가족 욕·루머보다 아이들 연상되는 내용에 눈물 #안산 화랑유원지 세월호 추모공원 설립 논란에 속상 #"다시는 이런 일 없게 안전한 대한민국 만들어 주세요"

"왜 지금까지 시끄럽게 하는지 몰라"
"왜 이사를 안 가는 거야?"

연극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의 한 장면. [프리랜서 장정필]

연극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의 한 장면. [프리랜서 장정필]

연극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원작 류성, 각색·연출 김태현)'는 이렇게 시작됐다.
세월호 가족 대상 연극 치유 프로그램을 계기로 2016년 3월 창단한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이 두 번째로 선보이는 작품이다.
경기도 안산시의 한 연립주택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연극은 2014년 4월 16일 참사 이후 희생자 가족들이 겪었던 아픔과 상처를 담아냈다.
지난해 7월부터 공연을 했는데 이달에만 16차례 걸쳐 경기 안산과 인천 등에서 공연하고 있다.

내용은 이렇다. 104호에 사는 세월호 유가족 '신순애'는 세월호 참사 이후 동네에서 따돌림을 당한다.
음식을 나누고 속엣얘기까지 나누며 누구보다 친하게 지냈던 이웃마저 각종 루머를 입에 올리며 소리 없는 공격을 퍼붓거나 외면한다.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은 103호로 새로 이사 온 '김영광 할아버지'다. 자신이 만든 닭죽과 음식을 나눠주고 이웃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는 김 할아버지의 따뜻함에 동네 사람들은 물론 세월호 유가족 신순애도 마음을 연다.

연극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의 한 장면. [프리랜서 장정필]

연극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의 한 장면. [프리랜서 장정필]

무대에 오른 배우 8명은 단원고 희생·생존 학생의 엄마들이다. 세월호 유가족 신순애 역은 김성실씨(동혁엄마)가, 이웃을 달래는 김영광 할아버지 역은 박유신씨(예진엄마)가 맡았다. 101호에 사는 자칭 아티스트 나세찬 역은 이미경씨(영만엄마)가, 102호에 사는 험상궂은 아저씨 한대철 역은 김명임씨(수인엄마), 대철의 딸 한소라 역은 김도현씨(동수엄마)가 담당한다.
밉살맞은 부녀회장 역은 최지영씨(순범엄마), 복지사 등 1인 3역엔 임영애씨(준영엄마), 전도사·택배사·김유리 등 1인 5역엔 생존학생 엄마인 김순덕(애진엄마)가 활약하고 있다.

노란리본 단원들. 왼쪽부터 영만엄마 이미경씨, 수인엄마 김명임씨, 동혁엄마 김성실씨, 김태현 연출가, 예진엄마 박유신씨, 순범엄마 최지영씨, 동수엄마 김도현씨, 준영엄마 임영애씨, 생존학생 애진엄마 김순덕씨. [프리랜서 장정필]

노란리본 단원들. 왼쪽부터 영만엄마 이미경씨, 수인엄마 김명임씨, 동혁엄마 김성실씨, 김태현 연출가, 예진엄마 박유신씨, 순범엄마 최지영씨, 동수엄마 김도현씨, 준영엄마 임영애씨, 생존학생 애진엄마 김순덕씨. [프리랜서 장정필]

이 작품은 아픈 내용을 담고 있지만 코믹한 요소도 많다. 그래서 관객의 웃음소리도 적지 않게 나온다. 하지만 날카로운 비수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을 4년째 따라다니는 신랄한 비난이 희생자의 가족인 배우들의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온다. "누구는 갑자기 돈벼락을 맞게 생겼네." "죽은 애만 불쌍하지. 산 사람들 인생은 앞으로 편하지 뭐" "막말로 나라를 지키다가 그런 것도 아닌데…"

공연을 앞두고 연출가 김태현씨와 화이팅을 외치는 노란리본 단원들 [프리랜서 장정필]

공연을 앞두고 연출가 김태현씨와 화이팅을 외치는 노란리본 단원들 [프리랜서 장정필]

연극의 각색 작업에는 희생자 가족인 배우들이 직접 참여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우리보고 나쁘데요"라고 말하는 신순애의 극 중 하소연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연출가 김태현씨는 "2개월 정도 어머니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대본에 고스란히 담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공연 연습을 하면서도 어머니들이 많이 울고 힘들어해서 연습이 중단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연극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공연 전 연출가 김태현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노란리본 단원들 [프리랜서 장정필]

연극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공연 전 연출가 김태현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노란리본 단원들 [프리랜서 장정필]

몇 개월을 연습하고 무대에 올랐지만, 엄마들의 눈가는 항상 촉촉하게 젖어있다.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고 웃는 중에도 아이들이 연상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특히 김영광 할아버지가 거동을 못 하는 아픈 아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그렇다.
"쌀밥 한 공기 딱 먹이고 싶은데. 김치찌개에 고기만 골라 먹어도 좋고. 닭죽 다 퍼먹다가 입천장이 다 까져도 좋으니 밥 한 끼만 제대로 먹을 수 있다면…"

한숨과 함께 작게 읊조리는 할아버지의 대사에 무대 위에 뒤에 대기하던 배우들까지 모두 목이 멘다.
'동수엄마' 김도현씨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을 욕하는 대사는 많이 들었던 얘기라 힘들지 않은데 부모와 아이가 티격태격 장난하는 장면이나 '밥 한 공기 먹이고 싶다' 처럼 내 심정이 묻어나는 대사는 눈물을 참기가 어렵다"며 "오늘 공연 장소가 (세월호가 있는) 목포라서 더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여고생 역할이라 단원고 교복을 입고 등장하는 그의 가방에는 아들의 실제 명찰(정동수)이 달려있었다.

연극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에서 여고생으로 나오는 동수엄마 김도현씨의 가방(빨간색) 아들(정동수)의 명찰을 붙여놨다. [프리랜서 장정필]

연극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에서 여고생으로 나오는 동수엄마 김도현씨의 가방(빨간색) 아들(정동수)의 명찰을 붙여놨다. [프리랜서 장정필]

치유 목적으로 시작한 연극이지만 엄마들은 여전히 아프다. '세월호 엄마'라는 손가락질이 때문이다. 웃으면 웃는다고, 울면 운다고, 연극을 하면 연극을 한다고 비난을 받는다. 얼마 전에도 한 엄마가 이웃에게 "아들을 잘 둬서 너희는 돈벼락을 맞았다"라는 비아냥을 들었다고 한다.
'수인엄마' 김명임씨는 "우리가 연극을 하면서 'ㅇㅇ엄마'라고 소개하는 이유는 먼저 간 아이들의 이름을 걸고 세월호 참사를 알린다고 생각하기 때문"라며 "공연이 끝나면 몸도 마음도 아파서 병원으로 갈 정도로 힘든데 가까운 이웃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니 마음 깊숙한 곳까지 너덜너덜해졌다"고 했다.
'순범엄마' 최지영씨는 루머와 비난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온몸에 빨갛게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병원을 가고 약을 먹어도 하도 스트레스를 받아서 낫지 않는다"고 했다. 남은 가족과 10분만 연락이 닿질 않아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의심부터 할 정도로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공연 뒤 관객과의 대화에 나선 노란리본 단원들. [프리랜서 장정필]

공연 뒤 관객과의 대화에 나선 노란리본 단원들. [프리랜서 장정필]

세월호 참사 4주기를 앞두고서도 엄마들의 마음은 심란하기만 하다. 16일 영결식 이후로 정부 합동 분향소가 철거되지만, 아직도 이뤄진 것은 하나도 없다.
2022년까지 들어서기로 했던 세월호 추모공원의 최종 부지로 분향소가 있는 화랑유원지가 결정됐지만,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일부 주민들은 '흉물'이라며 추모공원을 반대하고 있다.
'예진엄마' 박유신씨는 "우리를 위로하는 분들도 많지만 '화랑유원지에 추모공원이 들어서면 안산이 죽음의 도시가 된다'고 선동을 하는 사람도 있는 등 연극 제목처럼 요즘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있다"며 "추모공원은 다시는 우리 같은 사람이 나오지 말라고 하늘에 있는 아이들이 주는 선물이니 계획대로 완공돼야 한다"고 말했다.

관객들과 단체 사진을 찍은 노란리본 단원들, [프리랜서 장정필]

관객들과 단체 사진을 찍은 노란리본 단원들, [프리랜서 장정필]

연극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의 말미는 이웃들이 세월호 유가족인 신순애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며 끝이 난다.
"시간이 지나고 모두 다 잊어도 우리는 기억할게요." 엄마들의 소망도 그렇다.
'영만엄마' 이미경씨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지난 4년간 진상규명을 요구했던 것은 더는 이런 일이 없도록,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달라는 의미였다"며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 많은데 분향소는 곧 철거된다. 정권이 바꿨으니 다 해결됐을 것이라며 세월호 참사에 대한 관심을 끄는 사람들도 많다. 세월호 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까지 관심을 가지고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목포·안산=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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