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원 해고 압구정현대 그후…"이름만 관리원 변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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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의 한 관리원이 주차 관리를 위해 주민 차량에 오르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9월 공동주택관리법이 개정돼 '경비원'에서 '관리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비원은 주차관리 업무 등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상조 기자

11일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의 한 관리원이 주차 관리를 위해 주민 차량에 오르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9월 공동주택관리법이 개정돼 '경비원'에서 '관리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비원은 주차관리 업무 등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상조 기자

11일 오전 9시쯤 서울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의 동별 주차장은 이중 주차된 차량으로 빼곡했다. 주민 차량이 빠져나가 빈 공간이 생기자 초소에 있던 ‘관리원’이 나와 주차선 밖에 주차돼 있던 차량을 그 공간에 집어넣었다.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이런 식으로 차량 3~4대를 다시 주차했다. 그가 나온 초소 안에는 주민들의 차량 열쇠 100여개가 걸려 있었다. 41개동 3130세대가 모여 사는 이 아파트에서 수십 년째 반복되는 풍경이다. 세대 수에 비해 주차 공간이 적어 이중 주차를 해야 하고, 누군가 이를 관리 해줘야 해서다.

5년째 일하고 있는 관리원 A씨(58)는 “2월부터 ‘경비원’에서 ‘관리원’으로 신분이 바뀌었지만 업무는 딱히 달라진 게 없다. 주차 관리는 물론 분리수거장 정리, 택배 보관도 그대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A씨처럼 동별 초소에서 일하는 이들은 경비원이었다가 두 달 전인 2월 9일부터 관리원이 됐다. 입주자대표회 결정으로 기존 경비원들의 고용형태가 ‘직접고용’에서 ‘용역’으로 전환되는 시점이었다. 이 때 경비원 대부분은 관리원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현재 경비·관리인력 95명 중 79명이 관리원이다. 나머지 16명만 경비 업무를 본다.

이렇게 이름을 바꾼 이유는 지난해 9월 공동주택관리법이 개정돼서다. 경비원에게 경비 업무 외에 부당한 지시를 하거나 명령을 할 수 없다는 조항이 생겼다. 경비원이 주차관리를 하거나, 분리수거장 정리 등을 하면 불법이 됐다. 아파트에서는 이를 피하기 위해 ‘관리원’이란 이름을 붙였다.

한 관리원이 이중 주차된 차량에 오르고 있다. 주차 관리는 이 아파트 관리원들의 주요 업무다. 우상조 기자

한 관리원이 이중 주차된 차량에 오르고 있다. 주차 관리는 이 아파트 관리원들의 주요 업무다. 우상조 기자

하지만 현장의 관리원들은 일이 달라진 게 없다고 하소연했다. 5년째 일하고 있다는 관리원 B씨(60)는 “경비원일 때 쓰던 동 앞 초소에서 똑같이 근무한다"며 "동 주변을 돌거나, 낯선 사람이 보이면 ‘어떻게 오셨냐’고 안 물어보겠나.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게 경비 업무”라고 말했다. 그는 “법이 바뀌었다지만 업무가 딱히 줄어든 게 없다. 이 아파트에서 가장 바쁜 건 원래 주차관리였다”고 덧붙였다.

최근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관리원 휴게시간이 기존 6시간에서 13시간으로 늘어났다. 조한대 기자

최근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관리원 휴게시간이 기존 6시간에서 13시간으로 늘어났다. 조한대 기자

이들은 지난해보다 16.4% 인상된 최저임금(7530원) 상승효과도 못 봤다. 격일제로 24시간 일하는 이들의 휴게시간이 하루 6시간에서 13시간으로 늘어나서다. 그만큼 일을 덜 한 게 되니 임금이 상승해도 받는 월급은 동일하다.

10일 낮 12시30분쯤 한 관리원이 휴게시간인데도 분리수거장 청소를 하고 있다. 조한대 기자

10일 낮 12시30분쯤 한 관리원이 휴게시간인데도 분리수거장 청소를 하고 있다. 조한대 기자

관리원들은 휴게시간에 온전히 쉴 수 없다고 토로했다. 9일 오후 4시 15분쯤 관리원 C씨(58)는 차량 4~5대를 연이어 다시 주차했다. ‘저녁 휴게시간’(오후 4시~6시30분)이었을 때다. 그는 “주민들과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주차 관리가 업무인데 휴게시간이라고 나 몰라라 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7년째 근무 중인 관리원 D씨(60)도 “특히 주말에는 출근하는 차량이 별로 없어 많게는 100대까지 주차한다. 용역회사에서는 휴게소 가서 쉬라지만 쉴 때도 ‘주민이 찾는다’는 무전이 오면 가봐야 하니 초소에 계속 있게 된다”고 말했다.

이렇게 애매한 휴게시간은 결국 주민·관리원 간의 갈등을 낳는 원인이 됐다. 지난해 일부 경비원들이 주차 관리 업무 때문에 제대로 쉬지 못했다며 수억 원에 달하는 수당을 달라는 진정서를 고용노동부에 두 차례에 걸쳐 냈다. 그 일이 이번에 용역으로 전환된 계기라는 게 주민·관리원들의 전언이다. 입주자대표회장을 지낸 한 주민은 “주차 관리로 힘든 걸 아니 동별 반상회에서 경비원들에게 수고비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줘왔다. 그런데 이런 진정서를 내니 이참에 용역으로 전환해 버리자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주택관리법 개정이 입주자들로서는 앞세울 수 있는 구실이 됐다. 당시 입주자대표회는 경비원 해고(용역 전환) 사유를 ‘경영상의 이유’라고만 밝혔다.

결국 경비원을 상대로 한 ‘갑질’을 막겠다는 취지의 법 개정이 업무를 줄여주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용역 전환으로 신분만 불안해지는 결과를 낳은 셈이다. 한 관리원(60)은 “국회·정부 관계자도 입주자대표회랑 다를 게 없다. 현장 점검을 나와 실태를 파악했으면 우리 신분만 불안해진 이런 법을 만들진 못했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광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명분만 앞세우다 현실은 고려하지 못한 법이 만들어지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입법을 한 국회에서 입주자대표회·경비원 양측의 고충을 충분히 들은 후 국토교통부 등 행정부와 머리를 맞대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한대 기자 cho.hand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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