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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개 서체 천자문 … 서예도 비주얼 시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도쿄 긴자시부야 화랑에서 9일 자신의 심은혼융체로 쓴 ‘농필천자문’ 앞에 선 서예가 전정우씨.

도쿄 긴자시부야 화랑에서 9일 자신의 심은혼융체로 쓴 ‘농필천자문’ 앞에 선 서예가 전정우씨.

120개 서체로 720종류의 천자문을 쓴 서예가 전정우(70) 심은미술관 관장의 첫 일본 전시회가 9일 도쿄에서 시작됐다. 긴자시부야 화랑에서 15일까지 열린다. ‘심은’은 전 관장의 호다.

도쿄 첫 전시회 여는 전정우 관장 #삼성 비서실 나와 30대 서예에 전념 #이상화?고다이라 우정 담은 작품도

이번 전시회엔 전 관장이 쓴 120개 서체의 천자문 작품들 중 초백서체·후마맹서체·화폐문자체 등 3개 서체의 천자문, 여러 서체를 혼용해 하나의 천자문을 완성한 심은혼융체 ‘농필천자문’ 등 25점이 전시된다.

지난 2월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한국과 일본 국민들을 감동시킨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500m ‘이상화-고다이라 나오’의 우정을 부각한 특별 작품도 전시된다. 도쿄에서 열리는 전시회임을 감안해 전 관장이 특별히 준비했다.

인천 강화도 출신으로 연세대 화공과를 졸업한 그는 삼성그룹 비서실 등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30대 후반이던 1986년부터 본격적인 서예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2000년엔 문을 닫은 강화의 초등학교를 심은미술관으로 꾸며 작품을 전시중이다.

다음은 전 관장과의 일문 일답.

평창 겨울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트의 이상화와 일본 고다이라 나오 선수의 우정을 표현한 서예 작품.

평창 겨울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트의 이상화와 일본 고다이라 나오 선수의 우정을 표현한 서예 작품.

천자문을 120개 서체로 쓴 것을 알고 일본 전문가들이 혀를 내둘렀다는데.
“천자문은 쓰기가 어렵다. 보통 서예 작품은 두 자나 네 자 정도만 쓰면 되는데 천 개 글자를 모두 써야 하지 않나. 웬만한 서체들은 그 서체로 쓰인 글자들이 20~30개 정도만 전해 내려온다. 그래서 나머지 970자는 어떻게 써야 할 지를 자신이 직접 연구를 해서 써야 한다. 그래서 힘들다.”
이번 일본 전시회는 의미는.
“서예 잡지 관계자를 비롯한 일본 전문가들이 높게 평가해 주셨다. ‘일본에서 전시를 하고 싶다’는 말을 단 한번도 꺼낸 적도 없는데 그 분들이 먼저 서둘러 주셨다. 두세 번 정도 더 일본에서 전시회를 할 생각이다. 향후 해외 진출의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쓰는 서예에서 보는 서예로’라는 지론을 갖고 있는데.
“문자의 가독성만 따지면 한자로 쓰여진 서예 작품은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서예 작품을 한·중·일 국민들만 즐기라는 법은 없지 않나. 서예의 획에는 사상과 철학이 그대로 녹아있다. 글씨는 힘차고 강건해야 하며 또 리드미컬해야 한다. 유연하면서도 강렬하고 깨끗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를 초월해 감동을 줄 수 있다.”
천자문을 쓰게 된 계기는.
“2004년 ‘왜 5체(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로 모두 천자문을 쓴 사람이 없을까. 쓰면 큰 공부가 되겠다’고 생각해 쓰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쓰려고 했는데 3개월 만에 다 썼다. 다른 체로 응용하니 2년 만에 30체로 다 썼다. 크게도, 작게도, 종이에도, 병풍에도 써봤더니 120개 서체로 모두 720종류를 쓰게 됐다. 중국에선 원나라때 조맹부가 6체로 썼고, 일본에선 300년 전 3체로 쓴 사람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선 600년 전 한석봉 선생이 2체로 천자문을 썼다.”

도쿄=글·사진 서승욱 특파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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