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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北·中·러 삼각동맹] 中. 냉각되는 北·中 혈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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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북한은 그들을 노골적으로 적(賊)이라 불렀다."

그들이란 현재 국무위원인 탕자쉬안(唐家璇) 전 외교부 부부장과 그 주위 인물을 가리킨다. 중국의 한 외교소식통은 북한 당국자들이 1992년 한.중 수교를 막후 조율한 唐과 그 주변 인물에 대한 적개심을 이렇게 전했다. 끓어오르는 증오의 감정을 삭이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혈맹' 북.중의 관계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계기는 92년의 한.중 수교다. 이때부터 양국 관계는 때때로 감정대립까지 불사하는 '재(再) 조정기'에 들어서게 된다.

베이징(北京)의 한 전문가는 "한.중 수교 이후 북한은 중국 외교부를 극도로 불신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때 드리워지기 시작한 한랭전선은 아직도 걷힐 기색이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 북.중 외교부 사이의 주요 교섭과 왕래는 한.중 수교를 계기로 거의 멈췄다.

양국 의사교환은 주로 북한 노동당과 중국 공산당의 '당(黨) 대 당'교류에 국한됐다. 기우뚱거리기 시작한 북.중 관계는 북한의 김일성(金日成)주석 사망 뒤에 더 흔들렸다.

북과 중국 사이에는 긴급 사안이나 국내외 대.소사가 있을 때 이를 상대방에 알려주는 '사전 통보 제도'라는 게 있다. 이에 따라 해당국은 주요 해외 방문객을 맞이하거나 국가의 주요 행사, 사건.사고가 있으면 상대방에 통보한다.

그 제도는 혈맹의 유대와 공동 운명체라는 의식을 한데 묶은 것이었다. 잘 유지돼 왔던 통보제는 한.중 수교를 기점으로 퇴색해 가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94년 이후 유명무실해졌다. 99년까지 통보제는 창고에 처박힌 신세였다.

이 통보제는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 방문(2000년 5월)을 위해 99년 말 백남순(白南舜) 북한 외무상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회복된다. 白의 중국 방문은 김일성 주석 사망 후 북한 외무상으로는 처음이었다.

베이징의 한 관계자는 그러나 "제도가 복원됐다고 양국 관계가 정상화된 것은 아니다. 예전만큼의 성의와 배려가 없는 상태에서 통보제도는 형식적일 뿐"이라고 말했다.

내용과 형식 모든 면에서 북.중 관계는 계속 위축됐다. 지난해 9월의 북 신의주 초대 특구 장관으로 임명된 양빈(楊斌)의 구속 사건이 가장 상징적이다.

중국은 북한이 자국 군사.안보에 민감한 신의주를 특구로 만든다는 점, 중국 내 실정법을 어긴 중국계 네덜란드 기업인을 특구 행정장관으로 임명한다는 점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양빈은 부적절한 자격의 인물"이라는 중국의 충고도 얼어붙은 양국 사이의 강을 건너지 못했다. 결국 의기양양하게 평양을 떠나 중국 땅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의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했던 양빈을 중국 당국은 전격적으로 구속했다.

공식적으론 '양빈이 중국 법을 어겼다'는 것이지만 속내를 짐작하는 중국 내 소식통들은 "곪아 있는 양국 관계가 터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중국 지도부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이를 전후로 크게 경직됐다. 특히 양빈의 구속을 최종 결정한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의 대북관은 우호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朱전총리는 북한엔 싸늘했던 만큼 한국은 따뜻하게 대했다.

특히 98년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이 국빈 자격으로 방중했을 당시의 일화는 중국 지도부의 분위기를 읽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당시 의전을 담당했던 한국의 한 관계자는 "총리 주재 만찬이 있던 날 朱총리는 의전을 무시하고 댜오위타이(釣魚臺) 연회장 앞문에 15분 전부터 나와 金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렸다. 그건 당시 큰 화제였다"며 "金대통령의 저서 '옥중일기'를 사흘 만에 독파했다고 말한 朱총리는 金대통령을 정말 친한 친구처럼 대했다"고 소개했다.

중국 외교부에서도 탕자쉬안 현 국무위원을 중심으로 친한(親韓) 외교가 지배적인 흐름이라고 한다. 6자 회담을 이끌면서 스타로 부상한 왕이(王毅)부부장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과 '긴밀한 협의'가 가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북한과 다소 관계가 소원해지는 대신 한국과의 관계가 나날이 가까워지고 있는 중국 내 기류는 의도적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에 가깝다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한.중 교역액이 연간 4백억달러를 넘고, 인적 교류도 3백만명을 훨씬 웃도는 현실이 중국으로 하여금 자연스레 한국에 눈을 돌리게 만들었고, 이는 다시 북한과의 간격을 넓히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중국 사회과학원 국제전략연구판공실 선지루 실장 같은 사람이 "중국과 북한이 유사시 상호 방위에 나서기로 한 상호우호협력조약 제2조는 더 이상 중국의 정책에 부합하지 않는다. 군사 자동개입 규정을 삭제해야 한다"고 한 것은 그런 흐름을 자연스럽게 반영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북한 핵은 재조정기에 들어선 북.중 관계의 향배를 결정적으로 좌우할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중국이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느 정도 북한을 다시 끌어안으려는 노력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북.중 관계의 향배는 궁극적으로 북한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행동이 중국의 전략적인 이해의 틀을 벗어난다면 북.중 관계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베이징=유광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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