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한·미·중보다 정보 더 많이 얻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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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호 29면

지난달 27일 중국 베이징 양위안자이에서 북·중 정상 부부가 오찬을 한 후 시진핑 국가주석이 김정일 국무위원장을 환송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7일 중국 베이징 양위안자이에서 북·중 정상 부부가 오찬을 한 후 시진핑 국가주석이 김정일 국무위원장을 환송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반도 상황이 복잡해지고 있다. 남북관계 변화로 시작해 북·미 정상회담 발표에 이어 북·중 정상회담이 열렸다. 몇 주 전만 해도 북한 외교는 단선적이었지만 이제는 점점 여러 방향으로 뻗쳐 서로 연결될 수도,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는 거미줄이 되고 있다.

3국 정상과 차례로 직접 대화 나눠 #다른 3명보다 정보 우위에 서게 돼 #비핵화 ‘한국 패싱’ 우려는 커져 #북·미 정상회담 취소·실패해도 #북한 결정 중국 지지 얻을 가능성

화기애애한 남북관계는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와 고위급 특사 교환으로 시작됐고 최근 한국 예술단의 평양 콘서트로 이어졌다. 하지만 남북 간의 이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비핵화에 대한 심각한 토론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정상회담에서 비핵화를 논의하고 싶다는 한국의 요구에 북한이 짜증을 내면서 회담 의제에 올릴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일 수 있다. 북한은 그동안 비핵화 등 안보 이슈에 있어 한국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다루겠다는 생각일 수 있다. 이 경우 한국의 입장은 어려워진다. 남북이 비핵화 논의를 하지 못하면 한국은 가장 중요한 이슈를 다룰 회담에서 배제될 수 있고 트럼프 행정부엔 한국의 역할이 약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미·북 정상회담의 전망도 어두워지고 있다. 북한이 정상회담을 제안한 이후 마크 폼페이오 전 CIA 국장이 국무장관, 존 볼튼 전 유엔대사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됐다. 두 사람은 전임자들보다 훨씬 보수적이며 볼튼은 어떤 정상회담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이 좀 더 강하고 비타협적인 스탠스를 취하도록 설득하겠다고 이미 말한 바 있다. 더욱 안 좋은 뉴스는 지난달 29일 트럼프 대통령 스스로 미·북 정상회담이 실패할 수 있다는 언급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정상회담 실패는 북한엔 재앙일 수 있다. (먼저 정상회담을 제안한) 김정은의 리더십에 타격을 줄 수 있고 미국이 군사적 옵션 선택 쪽으로 돌아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북한 매체들은 미·북 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아직도 보도하지 않고 있는데 아마도 정상회담이 너무 위험한 선택이라는 판단이 들 때 취소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기 위한 것일 수 있다.

미·북 관계에 구름이 끼어있지만 김 위원장은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에는 매우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중국의 지지 또는 최소한 중국이 북한에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은 새로운 북·중 관계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김 위원장의 입지를 대폭 강화했다. 시 주석은 김 위원장의 평양 초청을 수락했고 김 위원장이 더 자주 베이징을 방문하도록 초대했다. 북·중 관계가 다시 전통적인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의 관계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북한이 미국과의 정상회담에 부담을 느껴 취소를 결심한다 해도 중국은 북한의 결정에 우호적일 것이다.

중국 방문은 시 주석과 개인적인 인연을 맺었다는 것 외에 김 위원장에게 또 다른 이익을 안겨줬다. ‘정보가 힘’이라는 중요한 외교 원칙이 그것이다. 한국 또는 미국과만 정상회담을 할 경우 김 위원장은 한국 또는 미국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중국과 세 번째 채널을 열면서 거미줄같이 복잡한 외교 채널 속에서 김 위원장 본인만이 남북, 미·북, 북·중 정상회담에서 무엇을 말하고 들었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유일한 사람이 됐다. 시 주석도, 트럼프 대통령도, 문재인 대통령도 한 다리 건넌 보고에 의존해야 한다. 한국·미국·중국 사이에 정보가 완전히 자유롭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김 위원장은 세 명의 리더보다 정보의 우위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김 위원장이 한국·미국·중국을 상대로 속임수를 쓸 수도 있다.

나아가 러시아와 일본이 정상회담을 희망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모스크바 방문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정상회담이 논의 중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러시아는 지금 영국에 있던 이중 스파이 스크리팔 살해 사건으로 서방과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북한 문제에 대해 미국을 도우려 하지 않을 것 같다. 실제 러시아는 벌써 대북 경제 제재 완화 움직임을 보이는데 지난 3월 북·러 무역대표단은 화기애애한 가운데 양국 간 상업거래 확대를 논의했다. 북·러 정상회담이 열리게 된다면 북한의 정보 우위는 한층 강화될 뿐만 아니라 제재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완화될 수도 있다.

여기에 일본 언론은 아베 신조 총리가 6월쯤 김 위원장을 만나길 희망하고 있다고 보도한다. 아베 총리는 향후 미·북 정상회담에서 일본을 위협하는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과 일본인 납북자 문제가 의제로 다뤄질지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몇 주 안에 북한은 맘만 먹으면 중국에 이어 한국·미국·러시아·일본 등 5개국과 정상회담을 할 수 있게 된다. 북한은 5개국 간의 질투와 긴장 관계를 잘 알고 있고 이를 스스럼없이 활용할 것이다. 나라별로 정상회담 핵심 의제가 다른 점도 활용할 것이다. 예를 들어 트럼프 대통령은 비핵화, 아베 총리는 단거리 미사일과 납치 문제, 푸틴 대통령은 서방세계를 흔들기 위한 북한과의 상업거래 강화를 논의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가령 아베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의 비핵화 요구 수준을 완화해 준다면 더 많은 납치자를 일본에 보내겠다고 제안할 수도 있다.

나는 베이징을 방문한 김 위원장이 카메라 플래시 앞에서 활짝 웃었던 것은 진짜로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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