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3)망자 극락왕생 빌어주기 50년|영산재 임송암스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불교의 가장 큰 의식의 하나인 영산재가 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는가 생각해 보게된다. 그것은 적어도 24시간 계속되는 큰 절의 거사적 행사. 그걸 꼭 지정해놓아야 보존할 처지가 됐는가.

<선종스님은 못맡아>
이 땅에서 1천5백여년간 뿌리내린 불교다. 전국의 사암수는 무려 6천여. 그만한 교세인데도 기본적 의식에 속하는 것이 불교계 자체로는 감당할수 없게 돼 따로 국가적인 보호조치가 필요한 지경에 이르렀다면 어쩐지 석연치 않다. 무엇이 그토록 절박하게 만들었겠는가 말이다.
문화재관리국의 이에대한 공식적인 조사 횟수만도 여러번이다. 65년과 67년에 「범패」, 같은 해에 「화청」, 87년에 「영산회상」, 84년에「식당작법」, 87년에「영산재」등의 보고서를 냈는데 실은 모두 연관된 내용이다. 뿐더러 당초에 제50호「범패회 명목으로 했다가 지난해 11월 의식 자체를 통틀어 확대지정하기위해 지정 명칭을 「영산재」로 바꾸기까지 했다.
『69년에 비로소 번듯하게 바깥차비의 재를 올려봤지요. 처음 구경거리라 테레비에서 나온다 야단들이었죠만, 동란후 한참동안 그럴 경황들이 있었나요? 요즘에야 다시 드뭇드뭇 재가 들기는 해도, 잘 하시던 노스님들이 자꾸 입적하시니까 웬만한 절에서는 격식 잡혀있는대로 감당하기가 어렵게됐지요.』
같은 조계종이라 하더라도 선종스님들은 재를 맡지 못했다. 주로 교종에 속하는 스님 중에서 그런 의식을 배워 행했다. 현존하는 전래의 대찰들은 거의 교종 승려에 의해 운영됐기 때문에 4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의식상의 애로가 별로 없었다. 지금 영산재의 보유자로 지정된 몇분 스님이 한결같이 대고종 소속인 것은 지난날의 그런 종풍에서 연유한다.
말하자면 영산재의 지도적인 어장 (범음을 하는 어산의 우두머리)으로 꼽히는 박송암스님(73)도 바로 태고종의 본산으로 돼있는 봉원사 (서울 신촌)에서 태어나 거기서 한평생을 보내는 승려다.
영산재란 절 마당에 장엄한 야외법당을 대대적으로 꾸미고 올리는 의식의 한가지. 흔히 극락왕생을 축원하는 이른바 영혼천도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아주 많은 대중이 공동으로 참여케 하려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므로 부처님 오신 날의 야단법사를 비롯해 결재날에도 행하며, 산 사람이 미리 길을 닦는 예수재라든지 수륙재·기우재로서도 베풀어진다.
하지만 단연 망인을 위한 발원 명목이 대부분이어서 외부로부터 출자되는 재는 49재·백일재·소상대상재·기재·사갑재등이 통례다. 또한 같은 음악적인 내용으로 진행된다 하더라도 화청에 이르면 대중적인 가요의 구성진 가락을 듣게 된다. 권왕가·원적가·회심가등이 그것이다.

<화청엔 대중적가락>
법당에서 갖는 순수한 의식절차 (안차비) 만이라면 간단하다. 그러나 괘불을 내다모시고 갖가지 등을 밝히며 조화와 청화목 (서기를 상징한 오색포), 불보살·신장상, 진언과 각종 번기등으로 일대 장관의 도량을 꾸미는 바깥차비에는 재주의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아무리 간단히 차린다 해도 4백만∼5백만원, 크게 하려면 2천만원이 소요된다.
『보통 17∼20명은 있어야되지요. 아주 줄여서 식당작법을 줄인다 해도 10명은 되어야 하고 많이 동원될 적에는 1백명을 헤아렸군요. 그래서 절에 큰 재가 들면 몇 분을 청송(재지내는 스님네 초빙)한다고 기별이 왔어요. 깍듯이 봉서를 들고와야 답장을 써줄만큼 아주당당했으니까요. 또 불청객 스님도 적찮게 모여드는데 대개 인연을 맺고자해서 오신 분들이므로 노자 정도는 다 보시해드렸지요.』
송암스님은 어려서부터 재 지내는 것을 보며 자랐다. 10세때 사찰내의 강원에서 초학과 중학과정을 마치고 14세때부터 신학문을 배웠다. 연희보명학교와 상동공업보통학교·상동상업학교를 다닌뒤 19세때 삭발, 입산했으면서도 이태동안 취직생활을 했다. 호텔·양복점·이발소·시계포를 전전해 보았지만 잡사가 아니꼽고 뜻이 범음 (불경 외는 소리) 에만 기울어져 결국 절로 돌아왔다.
그때만 해도 큰절의 승려 50명 가운데 30명쯤이 재의식을 도맡아 해내는 터였지만 노스님들 앞에선 좀처럼 아는체 하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재가자주 들 때여서 당사소에 앉아 지켜보는 노스님들이 꼭 십대왕같았다. 자칫 어물거리다간 『저 동무 불러들여라』『어디서 배웠지?』꾸지람이 아니라 그것은 분명히 불호령 이었다.
봉원사에는 안차비와 바깥차비에 밝은 어장 이월하스님이 계셨다. 영산재 자체가 엄격한 법요에 의거한 것이므로 그 정신부터 터득해야함은 물론이다. 만약 재 올릴 때 오자를 한두글자만 잡아도 인정 사정 두지 않았다.
악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선생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임모습을 지켜보며 『으으아 으으아』를 따라불러야 하는 구송 교수법이다. 그렇게 따라부르는 가운데 소리의 강약과 장단등 살이 붙어야 하는데 채 따라오지 못하면 죽비로 등감을 후리며 역정을 냈다.

<입모습만보고 배워>
『초할향 (봉헌일편향)은 필수적인 기초여서 그걸 마쳐야 음정을 가늠하게 되죠. 그런데 더러 안되는 사람이 있지요. 그런 동년배가 있으면 공부마친뒤 중강노릇을 해주게 되니까 나로서는 복습겸해 가르친 셈이었지요. 뭐든지 쉽게 배우기보다 길게 근근히 배운 것일수록 종당에 잘 하는게 세상 이치지요. 내가 남을 가르치는 일만도 자그마치 50여년이나 계속해 왔군요.』
영산재는 석가가 영경산에서 설법하던 영산회상을 상징화한 의식절차다. 그 의식을 야외용으로 걸맞도록 시청각 효과를 더했으며 성음에 맞춰 악기를 반주하고 법고춤·나비춤·바라춤 같은 무용까지 곁들인 것이다.
영산재의 음악적 내용은 범패와 화청으로 구분된다. 범패는 의식의 중심부분이 되는 상단권공으로 그 자체가 음악적인 뜻을 갖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범패를 배운뒤 범음에 들어간다. 범패는 염불송(한문으로 된 찬미가)을 얕은 가요조로 부르는 소리며 상주권공·각배·영산·예수·중예가 모두 이에 속한다. 범음은 경악자체를 뜻하는 용어로 짓소리와 홑소리로 구분하는데 바깥차비소리라 하면 으례 짓소리를 가리킨다.
짓소리의 경우 한 음의 길이를 8분20초까지도 길게 늘리는 까닭에 혼자서는 해내지 못한다. 보통 2∼3명이 서로 잇대어 소리를 뺀다. 물론 홑소리에 있어서는 1분 정도가 고작이다.
화청은 재의 후미부분에 속하며 장단 위주여서 흔히 「화청친다」고 말한다.
화청의 본뜻은 여러 불보살을 고루 청한다는 것으로 의식에 쓰이는 악성을 가리키지만 범패에 비해 훨씬 대중적인 내용이다. 곧 단조한 곡조의 장가형식으로 토속적인 염불송을 통칭하는 것이다. 화청을 회심곡이라 일컫는 것도 그때문이다.
화청의 독특한 리듬과 멜러디는 회심곡·염불타령등의 민속 가요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우리 민족에 알맞은 음곡으로 법문을 설한 것이어서 대중불교를 이해하는데도 귀중한자료다. 따라서 범패·범음에 3현6각, 혹은 태징·북·호적 같은 악기가 소용되는데 비해 화청에서는 북·꽹과리에 목탁장단이 고작이다.

<배속에서 우러나야>
『23세때있죠. 민혜당이라고 민영식씨 부인의 49재를 안암동개운사에서 올리는데 거길 참례하게 됐읍지요. 막 범음을 배운 직후여서 새 가사를 지어입고 우쭐댈만큼 영광스런 자리였습니다. 거기서 새벽 첫닭 울 무렵 운수상단고축(안차비)을 하는데 그것이 유치성으로 망자 축원 내용을 구성지게 해내 칭찬받았었군요. 그날 밤 가사를 분실하는 사건이 생긴데다 밤새 덜덜 떨다가 며칠동안 몸살을 되게 앓아 더욱 기억이 생생합니다.』
범음을 배울 적에는 다섯가지 요체를 거듭 주입시킨다. 즉 ①정직은 음성을 쓰되 바르고 곧게 함으로써 마음자세를 그와같이 함이요 ②화아는 잔잔한 날 물살 일듯 고루 부드럽게 함이다 ③청철은 성음의 탁함이나 저음을 가리지 않고 맑게 함이고 ④심만은 소리를 뱃속에서 끌어올려 깊고 가득차게 우려냄이다. 그리고 ⑤원문이라 함은 그 우렁참이 먼데서도 들을수 있음을 말한다.
실제로 범패 소리를 언급함에있어 고·하성의 잘 잡음과 인성의 기본이나 흘려짓는 소리의 숙달을 지적할망정 어산의 목소리가 본시 탁성이거나 촉성이거나를 탓하지 않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의 젊은 어산들이 법요를 제대로 배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고 송암스님은 걱정이 태산이다. 말하자면 정신을 제쳐놓고 형식만을 따르려는 경향이다. 「범패」와 「영산재」의 지정을 놓고 학계에서 이론이 분분한 것도 그런 문제와 상통한다. 그것은 오늘의 한국불교가 알맹이보다 겉치레에 치중하는 그릇된 유행과도 직결되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글 이종석 (중앙일보호암갤러리관장 문화재 전문위원)
사진 임영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