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와 살찐 돼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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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교수님 귀하.
양주동 박사의 수필에 이런 얘기가 있었다. 물론 교수라는 한자를 잘못 쓴 것이다. 비록 한자는 틀렸지만 그래도 방학동안 교수의 안부라도 물어주는 학생이 있다는 것이 반갑다.
교수를 영어로 「프러페서」라고 하는 것은 교수의 지위보다는 교수의 역할을 강조한 말이다. 그 전문성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전문성은 권위라는 말과도 통한다. 교수는 그 권위 위에서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것이다.
서구사회에선 한번 교수를 지낸 사람은 뒤에 무슨 일을 하든 교수라는 칭호를 일생토록 갖고 다닌다. 하버드대학의 교수경력을 가진 「키신저」는 미국의 국무장관을 지냈지만 지금도 교수소리 듣기를 더 좋아한다. 서독의 경제기적을 만들어낸 「에어하르트」박사도 재무장관과 수상을 지냈지만 교수로 불렀다.
우리사회에선 글쎄 모르긴 해도 전직장관들도 그전 직함따라 아무개 교수로 불리는 편보다는 아무개 장관이라고 하는 것을 더 좋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요즘 대학에서 학생들이 교수를 『살찐 돼지』라고 부른 것은 도덕적 개탄에 앞서 좀 의외다. 「J·S·밀」은 일찌기『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인간이 더 낫고, 만족해 있는 바보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편이 더 낫다』고 했었다. 「살찐 돼지」라는 표현이 얼마나 모욕적인 말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런 모욕이 다른 곳도 아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대학, 서울대학교에서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의 대학현실을 한 단면으로 보여준다. 물론 그것은 일부 학생의 일부에 한정된 일이며 많은 학생들은 소리없이 분노하고 그런 현실을 부끄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악과 분노만으로 이런 현실을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다. 이제 우리나라 대학도 학생은 학생의 자리로, 교수는 교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권위주의 시대의 오랜 숨막힘 속에서 교수들은 침묵과 방관의 자리에서 어쩌면 안주해온 것이 사실이다. 학생들은 그런 현실에서 독선과 용기만을 모든 가치판단의 척도로 삼아봤다. 지금은 그런 척도보다는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야할 때다. 농촌활동 할 돈을 주지 않는다고 교수를 「살찐 돼지」로 부른 것은 용기도 독선도 아니다. 못난 학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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